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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15. 2018

잘 살펴보세요, 이곳에도 삶이 있어요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션 베이커

아이들이 주인공인, 아이들의 시선으로 이뤄지는, 아이들의 세상이 배경인 영화를 볼 때 어른의 사정은 종종 이야기를 바라보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된다. 그러니까,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를 보고 나서도 이 이야기는 철저히 아이의 시점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카메라의 눈높이가 그러하며 더군다나 결말은 온전히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의 것이었으니까.


그러다가 다시, 영화의 무대 한편에 디즈니월드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영화가 워낙 저예산인 까닭에 여러 차례 소음처럼 등장하고 마는 헬기가 어딘가로부터 디즈니월드로 드나드는 헬기란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들의 삶을 알지 못하는 '바깥세상' 사람들의 존재를 떠올렸다. 이 영화가 온전히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라면, 이를테면 '무니'가 엄마 '핼리'(브리아 비나이트)가 생계를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모르고의 여부가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러나 후반부에 접어들어 분명 '무니'는 자신을 둘러싼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바로 그 '어른의 사정'을 안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비록 걸림돌이 될지라도 이 영화 속 아이들을 살펴보는 데 있어 어른의 일, 곧 영화 속 아이들의 부모들과 주변 어른들, 그리고 영화를 지켜보는 관찰자의 시점을 함께 개입시켜보기로 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아이들끼리 어울려 노는 시간은 단지 낮 시간이기만 한 게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 즉 엄마들이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시간이다. 남겨진 아이들은 마땅히 놀 만한 거리가 없어 남의 차에 침을 뱉기도 하고, 버려진 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쓰러진 나무 위에 올라가기도 한다. 행동을 보면 '무얼 하고 노는지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은' 동시에 그 '무엇'에 대한 선택권이 없는 아이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가 견지하는 시점과 대상과의 거리는 일정 부분, 아이들의 모습을 그저 순수함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어른들의 모습이 수시로 등장하지만 어른이 주인공이 되지는 않도록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의 주된 공간인 '매직 캐슬'은 인근의 '퓨처랜드'와 마찬가지로 디즈니월드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조성된 모텔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숙박시설로서의 용도를 잃고 홈리스가 된 사람들이 삶을 이어가는 거주의 공간이 되어 있다. 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그 현장의 곳곳을 지켜보면서, 이 영화가 아이들의 시점에 카메라의 높이를 맞추고 있다는 건 단지 아이들을 사랑하는 작가적 시선 때문이 아니라 하층의 소외된 사람들을 편견 없이 그 자체로 바라볼 줄 아는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바를 깨닫게 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여기서 '무니'를 비롯한 아이들을 관찰하는 인물인 '바비'(윌렘 대포)는 곧 관객의 시점을 대변하는 위치에 놓여 있기도 하다. 자꾸만 눈에 밟히고 때로는 성가시게 굴던 아이들이 어느덧 보살핌이 필요한 순수하고 여린 존재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보통 때는 착한 애들이에요"라고 말할 만큼 그 순수함을 옹호하게 되었을 때. '바비'는 관찰자이자 제3의 보호자가 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그는 '무니'의 외침을 듣지만 마음의 동요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만 할 뿐 막상 어떤 행동에 나서지는 못한다. 아마도 그는 '매직 캐슬'의 관리인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거쳐가는 모습들을 풍경처럼 바라봤을 것이다. 분명 그는 방관자는 아니다. 그러나 방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뿐이다.


다만 적어도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이 '바비'이든 누구든, 그 누군가가 어떤 행동에 나설 수도 있는 여지를 열어둔 결말이라고 여겼다. 남겨진 건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그러나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어른들의 성찰을 요구하는 영화인가. 이런 아이들의 삶도 있으니 알아봐 달라고 촉구하는 영화인가. 그렇지는 않다. 적어도 어떤 메시지를 주입시키려는 의무감은 영화에서 내비치지 않으며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지도 않다. 단지 보여주는 것 그 자체에 무게가 실려 있다. 여기, 이런 사람들의 삶이 있어요. 이들도 당신처럼, 먹고 웃고 걷고 뛰고 놀고,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당신은 이런 삶이 있음을 알고 있었나요? 딱 거기까지만 말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블랙 팬서>(2018)의 개봉 무렵에 옥타비아 스펜서는 "I will buy out a theatre in an underserved community [in Mississippi] to ensure that all our brown children can see themselves as a superhero."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타임] 2018년 2월 19일 'A Hero Rises'호에서 재인용) 이는 인종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더라도 '이야기' 자체에 깊이 적용할 수 있다. 인간의 삶에서 어떤 속성을 간파하여, 특정한 누군가를 대상으로 상정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보며 (영화의) 관객은 그 간파된 속성으로부터 인간의 일부를 정의하는 어떤 보편성을 본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이야기가 늘 LA나 뉴욕, 워싱턴 따위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만을 주인공으로 다룬다면 그 영화가 아무리 탁월한 영화적 성취를 거둔다 한들 영화의 지평은 그 세계를 고르게 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루 38달러짜리 모텔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영화에서 누구든 이입하거나 동일시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지는 것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비롯해 션 베이커 감독이 이야기를 발견하는 출처는 늘 거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집이 없는 사람들, 성소수자인 사람들, 유색인종인 사람들, 이민자인 사람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올랜도에 디즈니월드가 들어서기로 했을 때 그 프로젝트의 이름이라 한다. 물론 나는 몰랐다. 영화 속 헬기가 디즈니월드로 향한다는 것도 사후에 알게 된 정보다. 매일의 방값과 먹거리를 걱정하며 사는 영화 속 '무니'와 '핼리'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정말 많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는 점 역시 인정해야겠다. 그러니까,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공유해주기 위한 프로젝트가 아닐까.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 어떤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을 담지 않으면서, 그리고 '이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공감의 기회를 전해주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삶이 아름답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세상의 이면을 볼 줄 아는 영화는 언제나 빛난다. (★ 9/10점.)


<플로리다 프로젝트> 해외 포스터

*<플로리다 프로젝트> 이전 리뷰 '음지에서도 아이들은 그저 웃는다, 그것이 빛이라고':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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