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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pr 29. 2018

매 순간이 어떻게 내 삶을 이루는가에 관한 예술적 여정

<원더스트럭>(2017), 토드 헤인즈

여기 1927년의 소녀와, 1977년의 소년이 있다. 1977년에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편의상 대중문화계의 어떤 변화 내지 번영 같은 건 분명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보자. 다만 1927년은 확실하다. 유성 영화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영화 <재즈 싱어>가 등장한 해다. 그 영화와 <원더스트럭>(2017)이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나, 무성 영화에 소리가 입혀지기 시작한 시기라는 점은 기억해두면 좋겠다.


<원더스트럭>의 원작이 된 소설 [원더스트럭]을 쓴 작가 브라이언 셀즈닉은 이전에 영화 <휴고>(2011)의 원작인 [위고 카브레](원제: The Invention of Hugo Cabret)도 썼는데, 내가 <원더스트럭>을 보면서 그 영화, <휴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건 단순히 <휴고>를 좋아해서도, 원작자가 같아서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두 작품 모두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니 <휴고> 이야기를 잠시 하면서 <원더스트럭>에 대해 접근해보고 싶다.


영화 <휴고> 스틸컷


<휴고>는 마술사이자 오늘날의 극영화, 특히 SF라는 장르에 큰 영향을 준 실존 인물 조르주 멜리에스(1861-1938)를 향한 애정과 헌사가 가득 묻어나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다. 아버지가 남긴 노트에 담긴 비밀을 찾아 나서는 소년 '휴고'(에이사 버터필드)의 이야기다. 작 중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그림을 그리는 자동인형이 바로 그 노트에 나오는데, '휴고'는 자신처럼 호기심 많고 책과 영화를 좋아하는 (그러나 극장에서 한 번도 영화를 본 적 없는) 소녀 '이자벨'(클로이 모레츠)을 만나면서 아버지가 남긴 유품과도 같은 비밀에 점차 접근해간다. 그러니까 <휴고>는 소년 '휴고'의 이야기 속에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그 아버지와 어떤 관계가 있는 '조르주 멜리에스'(벤 킹슬리)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3D' 영화다. (이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 영화 최초로 분량 전체가 디지털로 만들어진 영화이면서, 3D 효과가 생생히 구현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원더스트럭> 스틸컷


<원더스트럭>은 먼저 1977년의 소년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알 수 없는 꿈을 계속 꾸던 소년은 아버지가 남긴 책 속에서 어느 서점의 책갈피를 발견하고, 책의 내용을 살펴보던 중 갑작스러운 벼락으로 인해 사고를 당한다. 하필이면 그 사고로 귀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된다. 여기서 50년 전, 1927년의 소녀 이야기가 등장한다. 소녀는 태어날 때부터 귀가 들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른들의 통제와 감시 속에 집 안에서 답답한 일상을 보내던 소녀는 신문에서 유명 배우인 엄마의 신작 출연 기사를 읽고는, 그 기사를 오려낸 채 무작정 집을 나선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휴고>는 소년과 소녀가 만나 함께 모험을 이어가는 이야기라 할 수 있고, <원더스트럭>은 1977년의 소년과 1927년의 소녀가 각자의 이유로 각각 떠나는 모험이 병렬적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자연히, 영화의 핵심은 두 소년과 소녀가 왜 여정을 나서게 되었는지 와, 두 이야기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만나는지가 될 것이다. 여기서 <원더스트럭>의 중요 배경 하나가 더 등장한다. '소리'다. 사실상 이 영화의 배경은 소리 그 자체인 동시에 곧 '영화'이기도 하다. (소년이 아버지가 남긴 책을 어두운 방 안에서 플래시라이트를 비춰 보는 장면은 그 자체로 어두운 극장 안 영사기에서 스크린으로 향하는 빛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소녀와 소년은 각각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인물이다.


영화 <원더스트럭> 스틸컷


무성 영화는 작품 안에서 발생하는 소리나 캐릭터의 대사를 관객이 들을 수 없는 대신 극장에서 오르간 등으로 직접 연주하는 음악이 소리의 공백을 일부 채워주며 대사는 검은 바탕화면에 자막으로 입혀진다. 이 점에 착안해 <원더스트럭>은 1927년 소녀의 이야기는 흑백으로 처리하는 한편 소녀가 마주하게 되는 주요 인물들의 대사 일부는 관객도 그 내용을 알 수 없도록, 자막 처리를 하지 않거나 소리를 소녀의 청력에 맞춰 아주 희미하게 들려준다. 두말할 것 없이 관객의 시점을 소녀의 그것에 맞추는 것이다. 1977년 소년 시점의 이야기는 영상이 흑백이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면, 1927년 소녀의 그것과 그 처리 방식이 거의 동일하다.


영화 <원더스트럭> 스틸컷


그러니까, <원더스트럭>은 하나부터 열까지 온전히 아이들의 입장과 눈높이에서 전개된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뉴욕에 오게 되는데, 뉴욕 시내에 그들이 들어섰을 때는 낯선 곳을 마주할 때의 신비감과 함께 미지의 공간에 대한 어린 마음의 두려움까지 포착해낸다. 소녀는 말을 하지 못하고 소년은 후천적 청각 장애인 탓에 말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뉴욕의 공간이 두 사람에게 주는 압도감은 거의 동일한 성질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시대의 패션과 당대의 음악 등을 활용하여 현장감 역시 탁월하게 전한다.)


소년과 소녀의 여정은 공통적으로 박물관과 미술관을 경유한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문화적, 역사적 산물들을 눈앞에서 겪는 이들에게는 집을 떠나 여기까지 온 이유를 잠시 잊은 듯 황홀감이 가득하다. 이 감정은 관객에게도 능히 전해진다. 나아가 두 개의 모험이 어떤 계기로 인해 하나의 이야기로 만나는 순간, 생각지 못했던 놀라움과 여운으로 흑백의 서사는 컬러풀해지고, 무성 영화처럼 보였던 이 이야기에는 마음의 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전해진다. 세상의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이 이 여정을 통해 자신의 삶의 나름의 소리를 터득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 <원더스트럭> 스틸컷


<휴고>가 영화의 예술적 기원을 찾는 과정이었던 것에 비해 <원더스트럭>은 소년과 소녀 개인과 그 가족에 관한 사적 기록을 헤아리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소박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관객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완성된다.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인물들의 여정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관객이 더 잘 보고 더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다수의 우리는, 이 세상의 많은 것들에 쉬이 무심해지곤 하니까. 이것은 그러나, 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른을 향해 성숙해나가면서 변화하거나 새로이 쌓아가게 되는 마음들 역시 중요하니까.


어릴 적부터 차근히 밟아온 삶의 주요한 궤적들. 그 작지만 다시는 없을지 모를 매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점. 삶의 작지만 구체적인 요소들이 어떻게 거대한 우주를 이루게 되는가. <원더스트럭>을 보며 든 생각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소년이 반복적으로 꾸는 꿈속 늑대들의 이미지는, 후반부에 이르러 밝혀지는 중요한 비밀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직접 언급되는 단어로 이 이야기를 조합하자면 <원더스트럭>은 일상의 '디오라마'가 인생의 '파노라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예술적 성취와 함께 포착한 작품이다. 후반부에 이르러 끝내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의 파노라마 속 숨겨진 디오라마들을, 미술관의 구석구석을 탐험하듯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길 권하고 싶다. 삶을 박물관에 빗댄 이 영화를 "시궁창 속에서도 우리 중 누군가는 별을 바라본다"라는 영화 속 인용보다 더 잘 압축하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나는 그저 '해피엔딩은 영화에만 있지는 않다는 믿음과, 예술을 생에서 처음 마주하는 순간의 경이', 그 정도면 될 것 같다. 이 말은 <휴고>의 리뷰를 쓰면서 적은 바 있다. (★ 9/10점.)



영화 <원더스트럭> 국내 메인 포스터

<원더스트럭>(Wonderstuck, 2017), 토드 헤인즈

2018년 5월 3일 (국내) 개봉, 115분, 전체 관람가.


출연: 줄리안 무어, 오크스 페글리, 미셸 윌리엄스, 밀리센트 시몬스 등.


수입: CGV아트하우스/그린나래미디어(주)

배급: CGV아트하우스


영화 <원더스트럭> 스틸컷
영화 <원더스트럭> 스틸컷


*2018.04.24(화) 메가박스 코엑스 '원더풀 시사회'(MX관) 관람

*<원더스트럭> 국내 메인 예고편: (링크)


영화 <원더스트럭>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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