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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ug 10. 2018

영화 속 '쓰는 인물'에 관해 그 영화가 쓰는 방식

<스탠바이, 웬디> 그리고 세 편의 한국영화

*영화 <스탠바이, 웬디>, <버닝>, <여중생A>, <변산>의 스포일러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코타 패닝이 주연한 영화 <스탠바이, 웬디>(2017)에서 극 중 그녀가 연기한 '웬디'는 자폐 증세가 있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누구보다도 글을 열심히, 계속 써서 마침내 파라마운트사의 '스타 트렉' 시나리오 공모전에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제출해낸다. 몇 가지 계기로 '웬디'는 우편을 보내지 못하고 공모전 접수처에 직접 발걸음 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지만 공모전 수상 여부보다 중요한 건 '웬디'는 끝내 투고에 성공한다는 점이다. '웬디'를 보면서 글쓰기의 어려움은 그것을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노력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다는 것, 즉 노력이 따르는 한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음을 뜻한다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는데, <스탠바이, 웬디>에 대해 생각하던 중, 인접한 시기에 본 세 편의 한국 영화를 함께 떠올렸다. ‘웬디’처럼, <버닝>의 ‘종수’(유아인)와 <여중생A>의 ‘미래’(김환희), 그리고 <변산>의 ‘학수’(박정민) 역시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거나 쓰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종수’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하고, ‘미래’는 소설을 쓰고 있으며 ‘학수’는 스스로 가사를 써서 힙합 오디션에 참가한다. 그러나 <버닝>에는 없고 <여중생A>와 <변산>에서만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쓰는 행위’ 자체다. 이 차이점은 결국 결말에 이르러 세 인물의 상태를 다르게 만든다. 텍스트보다 이미지, 이미지보다 영상 매체가 널리 소비되는 시대에 ‘글을 쓰는 인물’에 관해 다루는 영화를 본다는 건, 영상 언어와 문자 언어의 특질적 차이를 넘어 글을 쓰는 직업과 그 직업을 대하는 인물의 모습과 태도에 관한 발견이기도 할 것이다.


‘종수’와 ‘미래’, ‘학수’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그들을 다시 보게 만든 <스탠바이, 웬디>도 잠시나마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웬디’가 ‘스타 트렉’ 애청자인 것보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기능하는 건 ‘웬디’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쓰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공들여 쓴 시나리오 뭉치 일부를 파라마운트사에 가는 도중 잃어버려도, 물리적으로 펜과 노트를 손에 들 수 없는 상황이어도, 누군가 자신의 글에 대해 칭찬해 주지 않더라도 그녀는 쓴다. 잃어버리면 그 사라진 부분을 상상해서 다시 펜을 들고, 병상에 누워 펜을 들 수 없을 땐 머리로라도 쓴다.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우주 배경의 장면들은 ‘웬디’의 ‘스타 트렉’을 향한 ‘덕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곧 머리로 상상해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는 행위 자체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그녀는 생각한 것을 곧장 글로서 담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이 시나리오를 대충 읽고는 지루하다고 말해도 ‘웬디’는 주눅 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웬디’는 자신이 ‘스타 트렉’을 얼마나 깊이 아끼고 좋아하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스타 트렉’에 열광하는 ‘트레키’들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만한 시나리오를 직접 써내는 사람이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것을 고려한 채 쓰이는 시나리오는 소설과 달리 읽히기 위한 글이라기보다 그 자체로 ‘보이기 위한 글’이기도 할 것이다.) 좋아하는 것에 관해 그 ‘좋아함’을 단지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건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일이다. 글을 누구나 쓸 수는 있지만 실제로 모두가 쓰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 관한 지극한 애정은 물론,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성실함까지 갖춘 ‘웬디’는 여느 영화에서 아주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닐 것이다. ‘웬디’는, “유일한 선택은 전진”이라는 ‘스타 트렉’ 속 ‘스팍’의 말을 ‘계속 씀’으로써 몸소 증명하는 캐릭터다.




‘종수’의 무력감


<버닝>의 ‘종수’는 ‘웬디’와는 거의 정반대의 인물이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데다가 소설을 쓰고 싶다고는 하지만 스스로 “무슨 소설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토로한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어딘가 내 얘기 같아”서 좋아한다고 언급은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그걸 읽는 건 ‘종수’가 아니라 ‘벤’(연상엽)이다. (‘벤’이 어떤 작가를 좋아하냐고 ‘종수’에게 묻지 않았다면 그 대답마저 관객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에서 ‘종수’가 글을 쓰는 순간은 딱 두 번 등장하는데 하나는 변호사의 권유로 아버지를 위해 탄원서를 쓰는 대목이니 이것은 그가 쓰고 싶다는 소설과는 관련이 없다. 그 탄원서의 내용 역시 실제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 경험하고 느껴온 것과는 거리가 먼 상투적인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러닝타임 135분이 지나서야 등장하는, 이전까지는 성관계나 자위행위를 하기만 했던 공간인 ‘해미’의 집에서 ‘드디어’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종수’의 모습인데, 이때 영화는 오로지 ‘종수’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그의 표정을 담을 뿐, 그 노트북에서 쓰이고 있는 게 소설이라고 확신케 할 수 있는 요소는 담아내지 않는다. 탄원서를 쓸 때와 달리 모니터 화면도 보여주지 않는 대신 오히려 창밖의 시점, 즉 물리적으로 ‘종수’가 결코 취할 수는 없을 전지적 시점으로 전환되며 카메라는 남산과 후암동의 풍경을 향해 ‘종수’가 창문 안쪽으로 보이는 집 밖으로부터 점차 멀어진다. ‘종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만 할 뿐 영화 내내 끝내 아무것도 써내지 못한다. (‘종수’가 문예창작학과를 나오지 않았고 세 달 전에 갑자기 ‘소설이나 써볼까’ 하고 결심한 인물이라 해도 영화의 전개에 별 지장이 없다.)


‘종수’보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질을 더 갖췄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은 ‘해미’(전종서)다. 영화 초반 술을 마시면서 팬터마임에 관해 ‘종수’에게 이야기하던 ‘해미’는 “이건 재능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해미’는 어디서나 이야기를 만들어 늘어놓기를 좋아한다. 그녀가 여행 중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부시맨’들을 만났는지 알 수 없지만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에 관해 설명하는 대목은 단지 메타포를 넘어 이야기 자체로 흥미롭게 다가온다. 비록 ‘벤’의 친구들이 다소 심드렁하게 억지로 웃으며 지켜보긴 하지만 ‘부시맨’들의 춤을 재연해 보이는 순간에도 ‘해미’ 본인은 홀린 듯이 웃으며 즐겁게 몰입하고 있다. 어릴 적 자신이 우물에 빠졌고 그걸 ‘종수’가 구해줬다는 이야기는 후반 들어 가족의 증언에 의해 거짓인 것으로 밝혀지지만, ‘종수’의 어머니에 따르면 과거 마을에 물은 마른 채였으나 우물이 있었다는 점만큼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니 ‘해미’는 그것이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능’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직접 쓰지는 않지만 ‘벤’ 역시 글쓰기의 속성에 관해 일정 부분 간파하고 있다. ‘벤’이 친구들과의 모임에 ‘종수’를 합석시킬 때, 앞서 “글 쓰고 있다”라고 소개했던 ‘종수’가 “등단은 못했고 습작하고 있어요”라고 덧붙이자 ‘벤’은 옆에서 “작가는 쓰면 작가야, 라이터(Writer), 쓰는 사람.”이라고 거든다. ‘해미’의 실종이 ‘벤’에 의한 것이리라 생각하는 ‘종수’의 의심이 깊어져 가는 후반에도 ‘벤’은 “재미만 있으면 난 뭐든지 해”라고도 하고, ‘종수’에게는 직접적으로 “종수씨는 너무 진지한 것 같아”라고 자극하기도 한다.


처음 ‘벤’의 정체에 의문을 품은 ‘종수’는 ‘해미’에게 “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돈은 많은 수수께끼의 젊은 사람들.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아”라고 말하지만, 바즈 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 대해 일정 시점까지는 ‘종수’와 유사한 의문을 느껴왔을 ‘닉’(토비 맥과이어)조차도, ‘개츠비’와 가까워지면서 그로 인해 일련의 사건들에 휘말리고 인간과 세상을 향한 온갖 환멸을 겪음에도 결국은 자신이 경험한 바를 이야기의 형태로 완성해낸다. 영화 <버닝>이 오늘날 젊은 세대가 느끼는 사회를 향한 분노와 무력감을 은유적으로 담고 있다 하더라도, ‘종수’가 무슨 소설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기 앞서 “세상이 수수께끼 같다”며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에서 무엇이라도 의미를 붙잡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끝내 ‘종수’는 환경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다니거나 혹은 무기력하게 좌절하는 인물에 그친다.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결행하는 모습은 엔딩 직전 ‘벤’을 칼로 찌르고 차를 불태우는 행동을 제외하면 드러나지 않는다.


앞서 탄원서에 서명을 받기 위해 찾아간 한 농가에서 ‘종수’를 맞이한 외국인 여성은 서툰 한국어로 “무슨 일이에요?”라고 묻는데, 이것 역시 그 어눌한 말투 덕분에 “무슨 일해요?”처럼 들린다. 등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종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영화에서 여러 차례 무슨 일 하냐는 물음을 받으며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을 시험당한다. 낯선 사람의 악의 없는 질문에도 ‘종수’는 머뭇거린다. 개봉 당시 한 관객과의 대화 현장에서 이창동 감독은 “작가가 되려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청춘에게 기성세대의 경험에서 비롯한 조언을 바란다는 한 관객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버닝>이 분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영화였다면 ‘종수’가 소설을 쓰는 일보다는 그가 타인과 세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담는 데 주력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버닝>이 ‘종수’를 굳이 문예창작을 전공한 소설가 지망생으로 설정했다는 점과, 방황하는 청춘의 무력감을 담고자 했다는 연출자의 의도 사이에서 약간의 괴리를 느꼈다. ‘무기력한 청춘’이라는 결과를 정해놓은 채 영화의 과정은 오직 ‘종수’가 타인을 향한 끝 모를 열등감을 느끼고 사회와 환경을 자신이 감당해낼 수 없다며 체념하고 순응하는 모습만 담은 게 아닐까. 정말 글(삶)을 쓰기 위해서는 ‘해미’가 설명한 ‘그레이트 헝거’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리틀 헝거’가 우선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배고픔에 있어서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겠지만, 글을 쓰는 데 있어서 ‘리틀 헝거’란, 그저 매일 무엇이라도 써보는 행위일 것이다. ‘종수’는 삶의 의미와 무게만을 생각한 나머지 정작 일상을 잃어버린다. 결말 이후에도 ‘종수’는 비닐하우스를 찾고 또 사라진 ‘해미’를 찾느라 결국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소설가가 되지는 못할 것 같다. ‘벤’을 없앤 건 분노의 해소라기보다 그저 분노를 유발한 어떤 대상을 제거한 것에 불과할 테니까.




‘미래’의 몽상가적 의지


<여중생A>의 ‘미래’ 역시 외부 환경에 있어 수동적이기는 마찬가지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의 따돌림과 무시에 맞서지 못하고 집에서는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옷장에 숨을 수밖에 없다. 다만 ‘종수’와 달리 ‘미래’에게는 나름대로 효과적인 도피처가 둘이나 있다. 하나는 윈도 98이 설치된 낡은 데스크톱 PC에서 구동하는 온라인 게임 ‘원더링 월드’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이 쓰는, 아직 결말을 마무리하지 못한 소설이다. ‘원더링 월드’는 더 이상 게임 운영을 지속하지 못하고 서비스 종료를 선언한다. 게임 내 길드 ‘원더피플’에서 ‘다크’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미래’는 게임을 단지 오락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길드 구성원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서비스 종료 직전 몬스터를 사냥하려다 말고 그에게 “너도 혼자구나”라고 말할 만큼 게임 내 콘텐츠를 향한 애정도 있다. (딱 <레디 플레이어 원>의 ‘오아시스’ 개발자 ‘제임스 할리데이’가 후계자로 점찍었을 법한 인물이다.) 또한 ‘원더링 월드’가 사라져도 다른 게임에서 길드를 만들면 된다고 말할 정도로 가상의 관계도 소중히 여길 줄 안다. 그렇다고 해서 곧장 ‘미래’가 다른 온라인 게임으로 옮겨가는 건 영화의 현명한 전개가 아닐 것이므로, ‘원더링 월드’가 사라지게 된 후 <여중생A>의 무게 중심은 자연스럽게 ‘미래’가 쓰는 소설로 옮겨간다.


‘미래’가 소설을 다 쓰지 못한 건, 결말을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이야기에선 아무도 안 다쳐”라고 말하는 ‘미래’는 쓰고자 하는 이야기의 방향에 대해서는 명확하다. 뿌리와 가지는 잡고 있으나 줄기와 잎이 더 필요할 뿐이다. 소설 속 ‘여우’의 행동이나 특성으로 추정할 수 있는 바, 그녀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처럼 좋아하는 문학 작품도 있다. 학교 도서부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책을 좋아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고 필연적인 수순일지 모르지만, ‘미래’는 ‘웬디’처럼 좋아하는 대상이 있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성실성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친구들과 같이 점심을 먹지 못해 도서관 구석에서 컵라면을 먹더라도, 몸을 웅크리고 누운 채여도, 책은 손에서 놓지 않는다.


더 중요한 점은, 영화가 ‘미래’가 노트에 무언가를 쓰는 행위를 직접 보여줄 뿐 아니라 친구들 역시 그걸 알고 있다는 점이다. ‘백합’(정다빈)도 ‘태양’(유재상)도, “매일 거기에 뭐 쓰는 거”냐며 ‘미래’에게 물을 정도다. ‘백합’과는 청소년 문학 공모전에서 표절 시비가 생기고 ‘태양’과는 애정 관계에 있어서의 오해가 발생하지만 결과적으로 ‘백합’은 불순한 의도였을지라도 ‘미래’가 쓰는 소설의 결말부를 이어서 마무리하는 데 도움을 주고, ‘태양’은 “지금 이대로도 좋은 것 같다”며 ‘미래’가 공모전에 자신의 작품을 제출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준다. ‘백합’과의 갈등은 오히려 ‘미래’가 (사건을 조용히 해결하려는) 담임에게 “저한테는 중요해요, 제가 썼다는 게”라고 굽히지 않고 힘주어 말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미래’에게 협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던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미래’가 다 쓰지 못했던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갈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의 대상 수상에 힘입어 전국 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할 수 있게 되는 등 또 다른 ‘미래’를 가능하게 해준다. 물론 중도에 ‘미래’는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으니 그 과정이 순탄했다고 할 수는 없는데, 이 또한 ‘쓰는 행위’와 관련을 맺는다. ‘원더링 월드’ 내 길드 멤버였던 ‘재희’(수호) 역시 알고 보니 자살을 택한 인물이었고 두 사람은 ‘재희’의 주도로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것들을 다 해보자며 버킷리스트를 만드는데, 이 목록은 메모장에 직접 펜으로 씀으로써 만들어진다. 함께 레스토랑과 치과에 가고 영화를 보면서 버킷리스트는 줄어드는 듯 보이다가 마침내 ‘유서를 쓰는 것’만을 남겨두게 되고, 이는 두 사람이 ‘더 살아보기로’ 결심하면서 유보된다. ‘미래’ 역시 어쩌면 ‘종수’처럼, 교내 따돌림과 가정 폭력에 끝내 무기력할 수도 있었을 인물이지만 온라인 게임으로 알게 된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소설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중생A>의 ‘미래’의 여정은 자신이 죽더라도 이 세상에 슬퍼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지는 않겠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가상 세계에서만은 다 쓸 수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현실 세계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내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학수’의 정면돌파


앞서 언급한 인물들과 달리 <변산>의 ‘학수’는 시나리오나 소설을 쓰지는 않지만, 노래의 가사를 쓴다. 내레이션과 자막으로 제시되는 가사의 대부분 내용은 고향과 부모, 그리고 세상을 향한 자신의 솔직함을 담은 것들이다. ‘학수’가 자신의 삶을 버겁게 느끼는 건 하고 싶은 것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 ‘남들처럼’ 사는 것조차 버겁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만큼 살기도 어렵지만 나답게 살기란 더 어렵다. 게다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사회와 타인들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자신을 다시 불러낸 고향, 변산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학수’에게 하나같이 비협조적이다. 친구, 선배, 부모, 지역사회 모두 ‘학수’에게는 하루빨리 벗어나 외면하고 싶은 그늘일 뿐이다.


‘고향이라고 해준 건 없으면서 발목을 붙잡’는다고 생각했던 ‘학수’는, ‘제일 이상한 건 다시 이 골목에 서 있는 나’라고 여겼던 ‘학수’는, ‘꿈속에서도 돌아오기 싫었던’ 곳에 돌아온 ‘학수’는, 그러나 그토록 돌아오기 싫었던 곳에서 자신이 가장 행복했다고 느끼는 초등학교 5학년 때의 기억을 잠시나마 떠올린다. 노래방에서 ‘선미’(김고은)에게 ‘잘못’ 고백했던 것을 흑역사라고 생각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같은 병실에서 ‘선미’와 계속 부딪히는 과정에서 그녀 역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었음을, 노을에 자신처럼 사연을 품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게다가 ‘선미’는 작가 지망생이 아니라 이미 책을 출간했고, ‘내일의 작가상’을 수상해 매체의 조명까지 받는다.) ‘미경’(신현빈)으로 인해서는, 학창 시절 고백에 실패했던 기억에서 출발해 고향 선배이자 자신의 습작 노트를 훔쳐간 인물인 ‘원준’(김준한), 그리고 어릴 때 자신이 괴롭혔으나 이제는 처지가 뒤바뀌게 된 인물 ‘용대’(고준)와의 해소되지 못한 갈등을 해소하게 된다. 급기야 자신의 삶이 불행해진 주범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장항선)와는 그 해묵은 갈등을 ‘주먹’으로 푼다.


변산에서의 일들은 가족이기 때문에 발생하고 친구이기 때문에 갈등으로 깊어지지만 그 봉합과 해소의 과정은 ‘가족이니까’, ‘친구니까’의 당위가 아니라 어릴 적 기억으로부터 시작해 그 원인과 폐부를 하나씩 깊게 파고듦으로써 이루어진다. 게다가 이 과정은 ‘가난한 고향’이 결국 현재의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데 일조했음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하다. ‘학수’가 쓰는 노래들 대부분이 삽입된 내레이션의 형태로 제시되지만 영화는 서울의 좁은 고시원에서 지내는 그의 환경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어쨌든 ‘라임’을 맞춰보며 가사를 노트에 직접 끼적이는 ‘학수’의 모습을 생략하지 않는다. ‘학수’는 ‘보여줄 건 상처밖에 없었’다고 여겼던 인물에서 ‘받아본 적이 없어서 줄 수 없었던’ 사랑의 존재를 깨닫고 또 그것을 타인에게 주는 인물로 변모해간다. 특별 무대에서 ‘학수’가 부르는 곡 ‘노을’은 영화에서 벌어진 모든 에피소드들과 과거의 기억이 집약돼 있다. 그 무대 이후 그가 전국적 스타가 되었는지 여부는 물론 알 수 없지만, ‘쇼 미 더 머니’의 여섯 시즌을 나가면서 ‘내 맘 속엔 없어 평화 따윈 no peace', '내 랩을 봐 감히 누가 나를 가르칠래’ 등 저항과 반발심으로만 뭉쳐 있던 ‘학수’의 노래는 변산으로 오기 전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던 (‘엄마의 사진 속 그 슬픈...’) 이야기를 완성한, ‘폐항’으로부터 이끌어 낸 스토리로 더 풍성해진다. 영화 <변산>에서 ‘학수’가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평생 불행하기만 할 거라고 주저앉는 대신, 내가 앉은자리가 과연 어디인가를 치열하게 둘러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개완’한 주먹다짐이다. ‘작가’로서의 ‘학수’는 고향에서 물밀 듯이 닥쳐온 어두운 과거로부터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야기의 영감으로 활용해낼 줄 아는 인물이다.



‘쓰는 행위’가 ‘쓰는 인물’을 만든다


정리하자면 <버닝>의 ‘종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여중생A>의 ‘미래’와 <변산>의 ‘학수’는 ‘종수’와 달리 이야기를 ‘쓰는’ 과정을 포기하지 않으며 결국 그것으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버닝>은 ‘종수’가 글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며, <여중생A>와 <변산>은 반면 그 모습을 여러 가지 형태로 충실하게 담고 있다. 영화 속 캐릭터의 직업이 특정한 어떤 것으로 설정돼 있을 때, 그 직업으로서 행하는 활동 혹은 그 직업이 되기 위해서 행하는 노력은 다른 수많은 행동들(식사를 하거나 잠을 자는 등)과는 상이한 위치에 놓인다. ‘종수’를 위한 변명을 떠올리자면 그는 쓰기에 앞서 그 목적과 의미를 먼저 찾고자 했을 것이며, 자신을 둘러싼 상황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정립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벤’과 ‘해미’의 말을 좀 더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미래’와 ‘학수’는 쓰는 행위를 손에서 놓지 않은 동시에 주변인으로부터의 영향을 적절히 수용하면서 현실을 포기하지 않았다. 영화가 어떤 인물의 행위를 유심히 보여줄 때, 그는 결과적으로 그 행동을 계속하는 사람이 된다. 그건 그 영화가 과정을 아는 영화기 때문이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개봉한 세 영화, <버닝>과 <여중생A>, <변산>은 우연하지만 글쓰기에 관한 비슷한 철학을 상기하게 만든다. 앞으로도 한국 영화에서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더 지켜보고 싶다. 자신을 ‘소설가’로 소개하기보다 ‘쓰는 사람’이라 칭하기를 좋아한다는 어느 작가가, 자신의 책에서 글쓰기에 관해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처음부터 잘 사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그건 소설도 마찬가지다. (중략) 등단을 하기 전에, 그리고 등단하고 나서도 오랫동안 내가 착각한 것은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이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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