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Aug 24. 2018

오늘 같은 일이 언제든 다시 있을 것이라는, 가벼움

엔터테인먼트라는, 영화의 한계, 어쩌면

전에 한 영화의 GV 행사를 마치고 기자님과 같이 지하철을 타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날도 자연스럽게 영화와 커리어 이야기를 하게 됐다. 결론이랄 게 있을 리 없지만 굳이 있어야 한다면 국적과 시대, 장르를 초월해 최대한 많은 영화를 봐야 시야가 깊어질 수 있다는 거였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가 있다면 내가 못 보는 그 영화의 세계는 바로 그 작품이 아니라면 결코 같은 방식으로 겪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만 봐도 나는 끝내 그것들을 다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한편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겪어본 세계에서의 일상에도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아는 세계 역시, 다시 겪어보고 다시 돌아보면 거기에 새로움이 있다. 새로운 이야기 하나를 마주하는 일에도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경험과 과정이 깃드는 것처럼, 아는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조금 다른 환경에서, 조금 다른 사람과 향유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은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세 번째로 본 날이었다. 오늘도 내 앞에는 상영 중에 스마트폰 화면의 소셜미디어와 메신저를 기웃거리며 옆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그 옆사람과 뭘 먹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마신 음료의 일회용기를 자리에 그대로 두고 간 누군가가 있었다.


그 사람은 그 순간이 언제든 다시 있을 수 없는, 다른 무엇들과도 다르지 않은 한낱 엔터테인먼트이며 타임킬링이었겠지만, 문화를 대하는 모든 사람의 태도에 존중과 사유가 담기기란 불가능하겠지만, 그 사람의 극장 바깥의 삶에 대해 알 리도 만무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의 삶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섣부른 우월감이나 자만에 젖고 싶지도 않다. 다만 언젠가 그런 사람에게도 문화가 타인의 삶처럼, 그리고 자신의 삶과 닿아 있는 무언가로 다가올 순간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이 다시 없으리라는 건 내일이 되어서야 알 수 있는 거니까. 기자님의 말씀 역시, 조금은 비슷한 뜻으로 하신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고서는 다시 없는, 저마다의 삶들이 이야기에 있으니까. 오직 경험만이, 바깥 세상만이 안쪽을 조금 더 넓게 만들어줄 테니까. 다시 없는 것들이 그것들이 있는 순간에 무언가 특별한 사소함을 만들어줄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모두가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