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마치며
1. "한 인간의 내적 삶에는 그가 포함된 사회의 온갖 감정의 추이가 모두 압축되어 있다. 한 사회에는 거기 몸담은 한 인간의 감정이 옅지만 넓게 희석되어 있다. 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슬픔은 이 세상의 역사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어야 할 일이다. 한 인간의 고뇌가 세상의 고통이며, 세상의 불행이 한 인간의 슬픔이다. 그 점에서도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다."
(황현산,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난다, 2018, 169쪽.)
2. 주, 조연, 단역 할 것 없이 모두, '애기씨'를 살리기 위해 삶을 기꺼이 내던진 사람들. (단지 한 사람만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미래와 희망을 잃지 않고 생각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딱 살 수 있을 만큼이 자신의 삶이었지만, 저들에게는 곧 '살 수 없을 만큼'이 삶이었다. 삶의 이유가 곧 죽음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스터 션샤인]의 주역은 한시도 벗어나지 않고, 신분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이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슬픈 끝맺음이 영광스러운 것일 수 있다. 각자 걷고 있던 어떤 사람들은, 같은 곳에 다다르기도 한다. 걷는 길이 자신을 닮아, 멈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자신 대신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그 길을 끝까지 계속 걷는다. '션샤인'이 거기 있을 거라 믿고서.
3. 24부작에 회당 평균 방영 시간은 75분 가량. 오래도록 긴 호흡의 섬세하면서도 뛰어난 드라마를 볼 수 있어 기뻤고, 해피 엔딩일 수는 없다는 걸 이미 알고 보면서 매주 마음 졸였고, 완전한 새드 엔딩이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조금 웃었다. 또, 내가 영화 뿐 아니라 드라마 역시 거의 대등하게 좋아한다는 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를 볼 때만큼이나 새삼 재확인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연출과 각본의 균형, 인물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캐릭터화 시키는 엄정한 시선, 몇몇 주연만 돋보이도록 하지 않는 사려깊음, 먼저 떠나간 이들도 헛되이 소비하지 않는 균형 감각. 그저 그런 품질의 양산형 기획 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것과 너무나 비교되는 드라마의 세계다.
4. 방영 초기부터 그랬지만, 이 드라마에 '친일 미화'나 '식민사관' 같은 단어를 개입하려는 이들에게는, 과연 작품을 제대로 본 게 맞느냐고 묻고 싶다. (어떤 유튜브 크리에이터는 '친일파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드라마'라며 단편적인 장면과 대사 일부만을 보고 맥락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음이 여실한 콘텐츠를 올리고는, 자신에게 논리적이고 상세한 반론을 제기하는 의견에는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과연 그런 '콘텐츠'에, 깊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감상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모든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다 수용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떤 생각은 그 문화에 대한 몰이해 내지는 모독이 되기도 한다. 혹시라도 내가 이 드라마를 그렇게까지 좋게 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일제강점기를 배경이나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늘 제기되곤 하는 때로는 이상하고 편파적인 논란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5. "저 여인 하나 구한다고 조선이 구해지는 게 아니오." "구해야 하오, 어느 날엔가 저 여인이 내가 될 수 있으니까."
6. "화려한 날들만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질 것도 알고, 이런 무기로 오래 못 버틸 것도 알지만, 우린 싸워야지."
7. 집에 있는 TV를 일부러 치워버린 내게 이 드라마를 매주 챙겨보게 해준 건 넷플릭스였다. 보고 있는 [비밀의 숲]을 비롯하여 내게는 극장만큼이나 소중한 플랫폼이자 바다가 아닐 수 없다.
*글 제목: 이문재 시 '어떤 경우'에서 부분 차용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