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터슨>(2016)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의 일주일이 담고 있는 건, 막연히 기대했던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은 하루는 있어도 어제와 똑같은 하루란 절대로 없다는 이야기,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영화 <패터슨>(2016)에 대해 이야기할 때 중요한 건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이 노트에 틈틈이 시를 끼적인다는 것보다 그가 버스 기사라는 것이겠다. 그는 매일을 사는 사람인 동시에 세상의 모든 것에 조금 더 눈을 오래 둘 줄 아는 사람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곁에 잠든 아내의 이불을 올려 덮어주고, 성냥갑의 로고가 확성기 모양으로 쓰여 있음을 알며, 버스가 지날 때 차창 양옆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있음을 아는 사람. 같은 노선을 달리지만 누군가는 거기서 차이를 견문한다.
대단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을 매일 하면 되는 것이다. 꾸준히, 차근차근, 끼적끼적, 천천히. 매일이 새로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늘 눈 뜨고부터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마주하는 모든 것들 중 어느 하나는 반드시 어제와는 아주 조금 다를 것이라고 여기면 된다. 영화에 수시로 등장하는 쌍둥이들은 똑같아 보여도 반드시 다름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낸다. 누군가가 뱉은 말이 다른 이에게서 비슷하게 나오는 순간들은 반복의 리듬을 만든다. '패터슨'의 내레이션을 통해 제시되는 시들은 전문이 한 번에 읽히지 않고 도입에서 끝까지 몇 번의 과정을 통해 '쓰여간다'. 이미 영화가 담고 있는 모두는 곧 시인이다.
"등단을 하기 전에, 그리고 등단하고 나서도 오랫동안 내가 착각한 것은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이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월요일에서 시작한 <패터슨>은 다시 월요일에서 끝난다. 아니, 시작과 끝이라는 표현이 썩 어울리지는 않겠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고 해도 좋겠고 모든 건 이미 다 시작되어 있다고 해봐도 좋겠다. 성냥갑을 만지작 거리며 시리얼을 먹고, 작은 가방에 도시락을 싸서 출근을 하고, 동료 직원과 일상적인 안부를 나누고, 매일 버스에 오르내리는 조금 다른 승객들의 왕래를 놓치지 않으며, 매일같이 지나는 노선에도 실은 변화가 숨어있음을 알고, 지나가는 낯선 사람에게도 흔쾌히 인사를 건넬 줄 아는 사람. 무엇보다, 퇴근 후 집에 새로 걸린 액자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대단치 않은 일에도 기꺼이 감탄해주고, 무심한 듯 보여도 지금을 소중하다고 여겨줄 수 있는 사람.
'패터슨'이 자신이 썼거나 쓰고 있는 시를 누구에게도 온전히 보여주지 않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시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연히 생긴 새 노트에 그는 내일도 뭔가를 쓸 것이다. 이 모든 건 삶의 태도와 자세에 대한 것이다. 진정 좋은 영화가, 언제나 놓치지 않는 것.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무엇도 완전히 똑같지 않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관객이 알아차리게 하는 영화. 순간에 소홀하지 않을 줄 아는 사람에게는 찰나에서도 영원처럼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언젠가를 꿈꿔보면서, 어제를 쉽게 잊어버리진 않으면서, 오늘을 다만 끌어안으면서. 그러니 삶(시)의 리듬이란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삶이 매 순간 노래하듯 건네는 속삭임을 기꺼이 놓치지 않는 사람의 것이다. 아, '좋은 영화' 하니까 할 수 있는 말이 하나 더 있다. "이런 영화였어요"라고 간단히 정의내릴 수 없는 것. 짐 자무쉬는 "스토리보드를 미리 그리면 내가 뭘 찍을지를 미리 아는 게 싫다"고 어디선가 말했다. 영화가 곧 삶이 되는 순간이다. "인생은 이런 거야"라고 눙치듯 말하는 게 아주 많은 것들을 놓치거나 간과할 수 있듯이, 정말 좋은 영화는 줄거리나 사건 위주로 요약될 수 없는 성질을 반드시 담고 있다. "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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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그 하루가 오늘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남은 힘을 걸어보면서도, 살아있다는 그 아무렇지 않은 놀라움에 관하여. 좋은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란, 이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기 위해서일 것이며, 남들 하는 대로 살라는 말을 거부하기 위해서일 것이며, 또한 하나의 세계란 결론이 아니라 곧 과정이어야 함을 알기 위해서이기도 하겠다. '내일의 불확실한 그것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것 / 이 말들은 던져진 운명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 빠름보다는 느림을 준비하네 그러므로 시는 / 아무도 돌보지 않는 깊은 고독에 바치는 것이네 / 그게 좋은 시를 읽어야 할 이유'(천양희, 「詩作法」 부분, 『새벽에 생각하다』) 시는 이미지가 아니라 삶의 노래인 것이다. 나는 단지 내일도 가끔 영화를 볼 테고, 그리고 매일 무엇인가를 끼적이고 쓰는 사람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