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데이빗 핀처
흔히들 '인생영화'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너무나 좋아서 격하게 아끼는, 사랑하고 사랑해마지 않을 그런 영화 말이다. 그만큼 누군가에게 감동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영화가 실로 많으니 그런 표현이 이해가 되면서도, 어쩐지 썩 달갑지만은 않다. 살면서 접할, 아직 그 존재마저 모를 훗날의 명작들이 얼마나 많을 텐데 감히 ‘인생’의 영화를 논할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그래서 나는 '인생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아도 섣불리 한 편을 단정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언급하는 몇 편의 영화가 있기는 하다. 가령, <휴고>(2011, 마틴 스콜세지)라든가 <미스터 노바디>(2009, 자코 반 도마엘) 같은 것들, 그리고 여기,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내게 그 인생영화라는 표현은 의미가 조금 다르다. 인생에 대해 논하는 영화. 실상 모든 영화는 '사람이, 사람이 사는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것'인 바, ‘인생에 대해 논하는 영화’를 별도로 선별하는 건 무의미할 것이다. 맞다. 그러나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뜻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차분히 이르듯, 미리 생을 걸어본 어른의 입장에서 아직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갈 후배들에게 첨언하는 영화. 그러나 그것이 이른바 ‘꼰대’처럼 여겨지지 않는 영화다.
언제나 인간의 어두운 면을 치밀하게 탐구하기를 좋아하며 가정 환경으로든 성격적으로든 무언가 결여된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아온 데이빗 핀처 감독이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원제: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를 택한 것은 그의 작품 계보를 놓고 볼 때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서 납득할 만하다. 갓난아기로 태어나 늙어가는 삶을 뒤집어 백내장과 관절염을 달고 태어나 아기로 죽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라면 그 특수성으로 인해 오히려 우리 삶의 철학을 논하기로는 제격이다. 서론이 길었으나, 데이빗 핀처 감독이 <세븐>(1995) <파이트 클럽>(1999) 이후 브래드 피트와 9년 만에 다시 만난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이야기를 적어보려 한다. 굳이 이르자면 그간 감독이 파헤쳐 왔던 어두운 면의 반대편을 짚고 넘어가는 영화라 할 만하다.
삶의 철학을 논하는 작품으로서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인생을 대하는 태도 자체다. 주인공 벤자민(브래드 피트)은 80세 노인으로 태어나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자신의 존재를 특별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인생 이야기인데, 166분이라는 그다지 짧다고 할 수 없는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나면 이웃 아저씨 혹은 친구의 이야기를 머리맡에서 차분하게 전해들은 기분이다. 영화 속에서 벤자민과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의 딸인 캐롤라인(줄리아 오몬드)이 노년의 데이지에게 벤자민의 일기장을 찬찬히 읽어준 것처럼 말이다. 한껏 어깨에 힘 주고 거들먹거리며 철학에 대해 논한다면, 아무리 그게 옳은 이야기라고 달갑게 들리지 않는다. "나 이런 사람이야, 훗."이 아니라 "내가 거쳐온 얘기, 한 번 들어보지 않을래?"다.
1. 미운 정도 정임을 받아들이는 것
벤자민 버튼은 사실 처음에는 성 없이 그냥 이름만 ‘벤자민’이다. 양로원에서 일하는 퀴니(타라지 P. 헨슨)가 무심결에 지은 이름이 그것이었고, 친부모의 성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벤자민이 10대 중반(외모상으로는 60대)일 때부터, 어릴 적 그를 버린 아버지 토마스 버튼(제이슨 플레밍)은 그를 기웃거리며 접근하더니 차를 태워주고 술을 대접하는 등 친구가 되고 싶어 하고, 벤자민이 20대 중반을 넘어서자 마침내 자신이 그의 아버지임을 출생의 비밀과 함께 실토한다. “진작 말해주지 그랬냐”며 돌아섰던 벤자민은 재산은 많지만 주변에 친구 하나 없는 노년의 그를 조금씩 측은하게 여기기 시작하고(강가에서 두 ‘버튼’이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은 그 자체로 많은 감정을 동반한다), 아버지의 관에 그가 평생 업으로 삼아온 단추들을 놓아준 벤자민은 이후 스스로를 벤자민 버튼으로 칭한다. 단지 이름에 성을 붙인 것이 아니라, 나를 태어나자마자 매정하게 버린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첼시 호 선장 마이크를 따라 항해하며 인생의 굴곡과 단면을 배운 벤자민은 부모로 인해 이 순간 용서 내지는 용인이라는 것과,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깨닫는다.
2. 난 무얼 잘못했기에 이렇게 태어났나요?
어린 데이지(엘르 패닝)와 야심한 시각에 함께 촛불을 켜고 놀다 할머니에게 면박을 들은 벤자민은 퀴니에게 안기며 자신이 왜 이렇게 태어난 거냐며 토로한다. 그에게 퀴니가 해주는 말과, 피그미족 남자가 하는 이야기들을 미루어 당연하게도 영화는 벤자민 역시 출생은 남들과 조금 달랐을지 몰라도 결국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다른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갈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근원적인 외로움이나 아픔 같은 것을 그대로 겪을 것임을 시사한다. 그가 처음 봤을 때 푸른 눈을 잊을 수 없었던 예쁜 데이지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도, 벤자민이 큰 죄를 지어서 80세 노인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3. 일생에 자주 찾아오지 않는 기회
퀴니는 벤자민에게 누구나 거의 같은 삶을 살지만 살면서 몇 번쯤은 일생을 바꿀 기회가 찾아온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펼쳐지는 그의 생애를 놓고 보면, 어린 시절 데이지를 만난 것이 그러하고, 마이크 선장을 따라 첼시 호의 선원으로 몸을 실은 것이 그러하다. 소설에서 그다지 비중 있게 다뤄지지는 않는 것과 달리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데이지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니 그것이 첫째로 그렇다. 항구에 나와 바다를 구경하던 벤자민이 마이크 선장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호텔에서 엘리자베스(틸다 스윈튼)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 순간에는 모른다, 그 순간이 삶의 방향을 통째로 뒤바꿀 사건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인생에는 그런 일이 분명히 일어난다.
4. 맞아가는 줄도 모른 채 끼워가는 톱니바퀴
피츠제럴드의 단편과 달리 데이지와의 이야기에 갈수록 무게가 실리다 보니 영화와 소설 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느낄 수 있는 정수는 다르다. 감정적으로 이 영화가 깊게 파고 드는 대목이 많지만, 그것과 별개로 가장 좋아하는 시퀀스는 데이지가 교통사고를 당하기까지의 이야기다. 당연히 사고가 났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 말이다. 이 시퀀스 전체를 다시 보자. 데이지를 친, 그 택시에 타고 있던 여성의 일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장면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큰 사고였기 때문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단 1분 후의 미래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속성을 이보다 잘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발레 리허설을 마치고 공연장을 나선 데이지가 택시에 치여 다리를 다친 상황을 두고,
1)택시에 탄 손님의 행적: 집을 나서다 코트를 놓고 온 것을 깨닫고 잠시 집에 들렀다가, 마침 걸려온 전화통화를 하느라 시간을 지체함. 쇼핑을 하러 들른 매장에서 점원이 미리 상품 포장을 해두지 않아 시간을 지체함.
2)택시의 행적: 커피전문점에 들러 차를 마신 택시기사, 손님을 태우고 가던 중에 길에 갑자기 뛰어든 행인 때문에 급정거를 함, 그 행인은 알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5분 늦게 출근하던 중이었음, 배달 트럭이 길을 가로막아 잠시 시간을 지체함.
3)데이지의 행적: 리허설을 마치고 샤워를 함, 계단을 내려가다가 신발끈이 풀린 친구가 끈을 묶는 것을 기다림.
등을 시간순으로 훑으며 나오는 벤자민의 내레이션이 이렇다. "딱 하나만 멀쩡했어도." 맞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 중 하나만 일어나지 않았거나 조금 다른 양상이었더라도 데이지는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발레리나의 삶을 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지나고 나서 생각할 때의 일이다. 우리는 늘 수많은 사건의 순간을 지나오는데, 약간의 말장난을 하자면 우리는 언제나 그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는 것을 그 순간에는 모른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지각 출근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교통사고를 유발하는 원인이 될 줄 어찌 알겠는가, 그야말로 '나비효과' 같은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고, 그것들이 어떤 인과관계나 연결고리에 의해, 하나의 더 큰 사건을 유발한다.
5. 벤자민의 삶이 남긴 것
영화와 달리 소설에서는 벤자민의 삶이 그렇게까지 다이내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혼생활은 오히려 너무나 평범하고 권태로울 지경이며, 말년에는 (외모상 자신보다 나이가 들어보일 수밖에 없는) 아들에게 "삼촌이라 부르라"며 무시당하기까지 한다. 단지 노인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삶 전체의 양상을 뒤바꿀 치명적인 사건이었을 수 있지만 벤자민은 오히려 소설에서 그려지는 그의 삶보다도 훨씬 평범하고 일반적인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는 극성을 강화하기 위해 벤자민의 출생일을 1차 세계 대전 종전일로 옮겨온다.) 우연한 것이든 아니든, 인력으로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들이 주위에는 너무나 많다. 그렇다면 삶을 만드는 것은,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 '사건'들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일 것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는 상기에 열거한 사건들의 가짓수만큼이나 다양한 인생의 색깔들이 그려진다. 수영을 하는 삶, 단추를 만드는 삶, 몸에 문신을 새기는 삶, 시계를 만드는 삶, 발레를 하는 삶, 문학에 빠지는 삶, ... , 어머니의 삶, 아버지의 삶, 노인으로 태어나 아이로 죽어가는 삶. 몇 년을 살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삶 자체의 우위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80세 노인으로 태어나 18세 청년으로 서서히 늙어갈 수 있다면 인생은 행복할 텐데"라 했던 마크 트웨인의 말은 어쩌면 맞고 어쩌면 틀리다. 다만 나의 힘으로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한 것들이 이 세상에 많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흘려보낼 줄 안다면 내 삶은 조금이나마 더 여유롭고 행복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얼핏 평범해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누군가의 호기심을 자아낼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기 않을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그런 삶의 자세에 대해 부드럽고 차분하게 말하는 인생의 영화다. (★ 10/10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2008)>, by 데이빗 핀처
2009년 2월 12일 (국내) 개봉, 166분, 12세 관람가.
출연: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란쳇, 제이슨 플레밍, 틸다 스윈튼, 엘르 패닝, 타라지 P. 헨슨, 필리스 소머빌, 자레드 해리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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