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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30. 2015

당신은 생각하는 것보다 쓸모 있는 사람이다

<인턴>(2015), 낸시 마이어스

런웨이에서 미란다 편집장에게 시달리며 혹독한 뉴욕 생활을 했던 앤디, 이번에는 창업 1년 반 만에 2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회사 "About The Fit"의 CEO 줄스 오스틴으로 돌아왔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의 메릴 스트립이 <인턴>의 까메오로라도 출연했다면 참 재미있었을 거라는 뜬금없는 상상을 장난스레 해본다.) 서른 살의 워킹맘 줄스(앤 해서웨이)는 시간 단위가 아닌 분 단위로 각종 미팅이 빼곡히 잡혀 있는, 매우 바쁜 대표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사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타닐 정도다. '시니어 인턴 프로그램'을 도입했다는 것조차 잊을 만큼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던 중, 바로 그 시니어 인턴에 지원해서 합격한 벤 휘태커(로버트 드 니로)가 줄스의 직속 인턴으로 배정된다. 깐깐하고 사생활에 민감한 줄스는 벤을 오지랖이 넓다 여기며 처음에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이 익히 예상하듯, 줄스는 점차 벤의 진가를 깨닫기 시작한다. 퇴직과 사별을 거치며 이런저런 취미활동과 여행을 해봤지만 '집에 들어오는 순간 내가 쓸모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던 벤은 우연히 발견하고 지원한 인턴 공고 덕분에, 이 젊고 발랄한 회사에서 모두가 좋아하고 찾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가 되어간다.

일면 흔하고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휴먼 드라마처럼 보이고 "70세 인턴과 30세 CEO"의 관계 구도 자체만으로도 영화를 보기 전에 예상할 것들이 대체로 적중할 <인턴>은 다소 평범한 각본 자체보다는 벤과 줄스가 서로 가까워지고 소통하게 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 흥미를 찾을 수 있다.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이 거의 유사한 장면이라는 데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뭉클한 감동까지 전해지는 <인턴>의 주인공은 앤 해서웨이보다는 로버트 드 니로다. 40년이 넘도록 전화번호부를 만드는 회사에 청춘을 바친 벤은 자신의 경험이 세상이 바뀌면서 별 쓸모 없는 과거의 산물이라고 여겼지만, 전혀 다른 분야인 줄 알았던 인터넷 의류 상거래 회사에서 진가를 뽐낸다. 전문경영인을 원하는 투자자들의 압력 뿐 아니라 자신의 지나치게 바쁜 일상 탓에 외부에서 CEO를 영입하고자 했던 줄스는 벤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회사를 필요로 하고 회사도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영화에서 줄스가 전문경영인을 데려오려 했던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손수건은 빌려주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벤의 대사는 그야말로 영화 <인턴>을 한 문장으로 축약한 것처럼 다가온다. 스스로 활용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쓸모'라는 것이다. 불가피하게도 가정과 직장 사이의 균형을 어려워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21세기의 여성 중 한 명인 줄스에게, 벤의 녹슬지 않은 경험과 지혜(북미 포스터의 카피를 주목하라, "Experience never gets old"!)는 서로가 모르는 사이에 '나의 사생활까지도 열게 만드는' 관계의 힘이 된다. 극도로 힘들고 좌절을 부르는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교감할 수 있는 존재, 기꺼이 손수건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는 내 옆에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나 해외나 '여성과 노인이 주인공인 영화'는 만들어지기 쉽지 않은 모양이다. 전작 이후 6년 정도의 공백이 있었던 낸시 마이어스 감독은 <인턴>의 제작에 많은 공을 들였고 동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에 따르면 "만들어진 게 기적"이다. 이 따뜻하고 촉촉한 위로를 건네는 영화의 내용은 기적 혹은 비현실처럼 보이지만 꽤나 현실적이다. 실상 <인턴>은 현대 여성의 사회생활은 물론이고 은퇴한 노인들을 바라보는 편견 섞인 시선, 황혼의 로맨스 등과 같이 꽤 많은 테마를 아우르는 영화다. 벤과 함께 인턴생활을 하는 동료들을 포함해 줄스의 가족과 주변 인물 등 영화의 조연 캐릭터도 꽤 공들여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여러 서브 플롯들 간의 균형감은 조금 아쉬운 대목이다.)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현실적인 인물로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정규직, 그러니까 본격적인 사회 생활의 궤도에 이르기 위해 거쳐가는 단계와도 같은 '인턴(Intern)'이 영화의 제목인 것은 뜻깊다. 비록 이름 들으면 알 만한 회사의 부사장까지 지낸 인물이지만 로버트 드 니로가 맡은 '벤 휘태커'가 영화 속에서 발휘하는 지혜와 재치는 그저 나이만 먹어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수순이기는 하지만 그는 퇴직 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거듭했고, 젊은 사람들만 가득한 회사 "어바웃 더 핏"에서도 자신의 철학이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말끔한 정장과 1973년제 서류가방은 바로 그 상징이다.) 벤이 과거 다녔던 회사 건물이 바로 줄스의 회사가 쓰는 사옥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한편, 그는 직접 나무를 심고 그것이 자라는 것을 찬찬히 지켜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낡아버리지 않고 멋있게 늙어가는 것을 아는 어른이었다. 야근을 하다 벤과 함께 간식을 먹으며 "진짜 어른들끼리 어른의 대화를 할 수 있어서 기쁘다"는 줄스의 말이 그래서 귓가에 남는다. <인턴>은 이 시대의 어른을 위한, 어른이 되고 싶은 이들을 위한 영화다. 여전히 좌절하고 여전히 힘든 이 시대의 모든 '인생 인턴'들을 위하여. 당신은 꽤 쓸모 있는 사람이다. (★ 7/10점.)


<인턴(The Intern, 2015)>, by 낸시 마이어스

2015년 9월 24일 (국내) 개봉, 121분, 12세 관람가.


출연: 로버트 드 니로, 앤 해서웨이, 앤더스 홀름, 앤드류 라네스, 르네 루소, 냇 울프, 아담 드바인, 조조 쿠시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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