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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Dec 07. 2018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2018)

<부탁 하나만 들어줘>(2018)는 가볍게 즐길 만한 오락영화에 가까웠음에도, 간단한 줄거리만으로 요약해버리기에는 단순하지 않은 영화였다. 이야기 자체보다도 매 순간 어떤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캐릭터들의 얼굴이 더 인상적으로 각인되었다 할 수 있겠는데, 그들의 그 표정이 어디에서, 혹은 무엇에서 비롯하엿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영화의 원작 소설을 펼쳤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스틸컷


긴급! 긴급!
안녕, 맘들!
오늘의 포스팅은 이제까지의 포스팅과 성격이 다를 거예요. 더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요. 우리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크고 작은 일들, 아이들의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와 찡그림, 첫 걸음마, 처음 한 말처럼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저... 절박하다고 말하고 싶네요. 아주 많이요.
나의 절친한 친구가 사라졌어요. 이틀 동안 연락이 없어요. (...) (후략)

-다시 벨, 『부탁 하나만 들어줘』에서, 노지양 옮김, 현암사, 2017


소설의 첫 대목이다. 얼핏 최근 개봉작 <서치>를 떠올리게 하는 이 도입은, 그러나 그 영화와 달리 작품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보조적인 장치의 하나로 기능한다. 원작에서는 블로그, 영화에서는 브이로그를 운영하는 '싱글맘' '스테파니'(안나 켄드릭), '스테파니'가 사라졌다고 언급한 친구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 그리고 '에밀리'의 남편인 '숀'(헨리 골딩) 세 사람의 사연에 대해 각각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스틸컷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스틸컷


사람들은 왜 우리가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못했고 왜 정상적인 보통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았는지 - 한 번의 실수라 해도 극복하고 각자 갈 길을 가지 않았는지 - 궁금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앞의 책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간단한 부탁'은 '스테파니'에게 '에밀리'가 자신의 아들을 대신 학교에서 픽업해달라는 것이었다. 소설 속 '스테파니'의 말처럼 단지 부탁 하나만이 아니었다면, 한 번의 실수가 아니었다면, 이후의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까. 결과를 알고 나서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A Simple Favor'가 아니었더라도 '스테파니'와 '에밀리'는 각각 아들 '마일스'와 '니키'가 같은 반인 이상 언제라도 마주치게 되었을 것 같다. '부탁 하나만'이나 '다름이 아니라' 같은 부류의 말들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곤 하는가.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쌓이고 또 모여서,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연쇄 과정과 작용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스틸컷


두 사람이 친해지고, '에밀리'의 남편 '숀'이 등장하고, '에밀리'가 실종되고, '스테파니'가 '숀'과 가까워지는,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일들. 어쩔 수 없게도 소설에 비하여 영화에서는 '스테파니', '에밀리', '숀' 세 사람 각자의 과거사가 주로 일부 대사나 내레이션을 통해 간소화되거나 생략된 부분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소설이 일정 분량을 할애해 세 사람 모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술하고 있는 것과 달리 영화는 거의 '스테파니'의 시점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작은 차이는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의 이야기를, '스테파니'라는 인물을, 원작보다 더 워킹맘 혹은/그리고 여성의 시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스테파니'가 언제 어디서나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것. 그런 그에게 '에밀리'가 하는 "힘 있는 사람일수록 세게 나가야 해" 같은 말들이 실제로 이후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어요. 심장이 몇 번 뛰는 그 몇 초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죠.
-앞의 책


나는 약속을 지켰다. 내 인생에 더 이상 남자는 없어. 더 이상의 나쁜 선택은 없어. 나는 마일스만을 위해 살 거야.
에밀리가 사라지기 전까지. 그리고 숀을 알기 전까지는.
어쩌면 상실감이 나를 미치게 한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비극이나 슬픔이 보통의 날들에 내 안 깊숙이 숨어 살던 악마들을 바깥 세상으로 풀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앞의 책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의 에필로그는 마치 이 일이 실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한 것처럼, 위트 있는 자막으로 (물론 '실제'라는 단어를 직접 쓰거나 언급하지 않지만) 내용을 적고 있다. 장르적으로도, 무엇 하나로만 명확히 규정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만큼 (폴 페이그 감독의 전작들도 그러하듯) 스릴러 혹은 미스터리와 약간의 코미디가 크게 이물감 없이 섞여 있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의 한 가지 갈래가 있다면 '끝났다'는 느낌을 주기보다 '여기까지'만 보았다는 인상을 주는 쪽이겠다. 영화는 끝났지만 '스테파니'와 '에밀리', '숀'은 스크린 속 혹은 바깥 어디라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으로. 소설을 뚫고 나서 생생하게.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국내 메인 포스터

<부탁 하나만 들어줘>(A Simple Favor, 2018), 폴 페이그 감독

2018년 12월 12일 (국내) 개봉, 117분,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블레이크 라이블리, 안나 켄드릭, 헨리 골딩, 더스틴 밀리건, 앤드류 라넬스, 사라 베이커, 에릭 존슨 등.


수입: 그린나래미디어(주)

배급: (주)팝엔터테인먼트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스틸컷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관람 (2018년 11월 29일 CGV 용산아이파크몰)

*<부탁 하나만 들어줘> 국내 메인 예고편: (링크)

*영화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글의 제목을 쓰려다 '사소한'이라는 단어에서 어쩔 수 없이 황현산 선생님의 책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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