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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Dec 12. 2018

국가가 아니라 가정이 무너졌던, 20년 전 그리고 현재

영화 <국가부도의 날>(2018)

글을 쓰기 전에 영화에 대한 반응들을 늘 먼저 살피는 편이라 다소 감상 바깥의 것에 해당하는 내용이 담길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하나 짚어야겠다. 먼저, 그 어떤 역사적 사실 혹은 실화 기반의 작품이 그러한 것처럼 <국가부도의 날>(2018) 역시 특정 단체나 인물 등을 '재구성'했고 '실제와 다를 수 있다'는 걸 명확히 전제하고 있으므로 영화 속 IMF와의 협상 과정이 실제로는 어땠는지, 외환 위기의 경과가 실제로는 어땠는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즉, 영화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 전부 사실 그대로라고 주장한 적이 없으므로, 영화가 하려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사실을 왜곡한다'는 종류의 이야기는 불필요하다. 서사를 전개해, 즉 펼쳐 보여주는 것은 각본과 연출의 몫이겠으나 그것이 전하는 바를 수용하는 것은 바로 그 수용자의 주체적인 몫이어야 하니까.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당연하게도 나는 <국가부도의 날>에서 다루는 설정들 전체가 사실 그대로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영화가 '한시연'(김혜수)과 '윤정학'(유아인), '갑수'(허준호)의 이야기를 각각의 축으로 설계해두었을 목표에 비해 전개가 다소 평면적(이를테면 선악)이라고 생각했고 세 사람의 이야기가 하나로 제대로 어우러지지도 못한다고 느꼈다. 뻔한 선악 구도라는 것은 소수의 정부 관료와 대기업 집단을 악의 축으로 묘사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건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어떤 사상적 혹은 정치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영화가 캐릭터 설정을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IMF 총재와 미국 재무부 차관이 함께 입국한 점을 시연이 간파해내고 그가 합리적 의심을 거두지 않는 캐릭터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20년 후에 각각 어떤 모습인지를 에필로그의 형태로 묘사함으로써 "위기는 반복된다"라는 점과 "깨어 있으면서 의심과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얼마간은 영화가, 이를테면 '한시연 팀'과 상대(정부와 대기업)로 갈등 구조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에 시연과 정학, 갑수의 세 이야기가 조금 더 리듬감 있게, 혹은 일체감 있게 만들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놓아둔다. 세 축이 하나는 상황을 설명하고 긴장감을 만들기 위해, 하나는 전자가 구축한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들과 (20년 전에는 85% 이상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생각한다 답했을) 다수의 소시민 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설정된 역할극처럼 보이기에 오히려 그 셋이 하나의 영화 안에서 만난 순간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연의 팀은 훌륭한 역할을 했지만 시연과 정학, 갑수는 저마다의 몫은 해냈을지언정 훌륭한 앙상블이 되지는 못한다.


<국가부도의 날> 속 그런 인물들을 보면서 어쨌든 관객 각자가 당시를 떠올리면서 느끼는 바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겠고, 영화 자체가 그 시기를 현재에 끄집어내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이었을지에 대한 나름의 추측 역시 해볼 수 있겠는데, 우선 전자는 영화의 만듦새와 무관하다. 영화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관객은 1997년 당시의 자신의 기억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다. 어떤 이는 실제로 자신 혹은 부모나 가족, 지인 중 누군가 부도나 실직 등을 경험했을 수 있으며 또 어떤 이는 그 시기를 별반 위기라 느끼지 못하고 무감히 통과했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실제로 금융계열에 종사했다든지 하여 당시를 더욱 밀접하게 체험했을 수 있다. 지방 소도시에서 국가 기관(지금은 공기업)에 다니는 부모를 둔 채 초등학생 시기를 보낸 내게는 그 시기가 아주 드라마틱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군가에겐 아닐 것이다. 영화에 대한 이야길 하려면 이것도 지나 보내야겠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그러니까 후자. 1997년 그때를 지금, 2018년 극장에 <국가부도의 날>이 다시금 소환해낸 까닭 혹은 목표. 영화의 에필로그는 그것을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20년 후로 건너뛴 영화는 정학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갑수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시연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를 각각 보여준다. 그리고 정학과 시연의 유사한 내레이션을 다른 문맥으로 전달한다. 여기서 갑수에게는 어딘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에게 호통 치는 모습과 금융권 면접을 보러 가는 아들의 모습을 할애할 뿐 내레이션을 부여하지 않는다. 시연이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의 부름을 받고 가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영화가 끝난 후의 무의미한 상상이겠으나) 직접 알 길은 없지만 어떤 위기가 반복되고 있음을 각료들에게 설득하기 위함일 것이다. 정학이 (얼핏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2013)의 에필로그를 떠올리게 하는) 투자 강연을 마치고 자신의 회사로 들어서는 모습은 반복되는 위기 속에서 누군가는 또다시 기회를 포착할 것임을 영화 전반부에 이어 재차 역설하는 것이겠다. 전직 재정부 차관에서 투자 회사의 오너가 된 이와 재벌 3세(이제는 회장이 된)의 만남은 '국민의 과소비' 같은 것으로 화살을 돌리고 자신은 또 다른 이익을 취했던 이들이 존재함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일 테다.


간단하고 거칠게 말하면 이 모든 건 '오늘날 '헬조선'이란 단어가 보편화된 까닭'을 되짚어보는 것일 텐데 적어도 그 점에서는 <국가부도의 날>이란 영화의 존재 이유가 충분하고 또 스스로의 몫을 잘 해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부도난 것이 아니라 가정이 붕괴되고 사회가 불안정해지며 양극화가 심해진 날. 바로 그날. 나는 이 영화가 감정적이면서도 동시에 치밀해서 얼마간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너무 한시연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고 뻔한 선악 구도로 흐르고 있는데 상황 자체가 공감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시연이란 캐릭터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하나, 그와 같은 인물이 조금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시연(을 비롯한 여성)을 재정부 차관처럼 대하는 인물이 많았을 텐데 시연과 같은 분석력과 선한 의지를 지닌 인물이 남성 관료들 중에서도 있었다면. '이아람'(한지민)의 등장을 통해 <국가부도의 날>은 과거에 그러진 못했지만 이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한가닥 희망을 남긴다. 영화여서 가능할 수 있는 선한 믿음. 20년이 지난 시점을 살고 있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이전 세대의 과오이므로, 지금은 그때와 달라질 수 있다는 경종.


둘, "지금부턴 우리가 시스템이야"라고 책임감을 느낀 누군가가 있었음에도 당시의 그 사회는, 그리고 지금의 이 사회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자조. 어차피 누군가는 사적 이권을 챙길 것이고 정보에 기민하지 못한 누군가는 피해를 입거나 몰락할 것이며 와중에 어떤 이는 눈치껏 기회를 포착하겠다는, 약육강식 같은 것. 위기는 반복된다는 사실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적어도 IMF 총재가 입국하기 전까지는 모처럼 아주 훌륭한 한국영화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중반 이후 그 감탄이 누그러졌고 아쉬움들이 다가왔으나, 내게는 에필로그에 들어서 다행히 '제 역할은 어느 정도 하는' 영화로 맺어질 수 있었다. 아니, 모든 이야기는 그 순간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몇백 년 전에야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다 가는 사람들이 많았겠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은 지 오래이며 굳이 '헬조선'을 외치지 않더라도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울타리로써의 역할을 극히 희미하게 된 지 오래다.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는 종류의 구호는 구 시대의 것이 된 지 한참이다. 지금, 사람들은 '국민'들의 과소비로 외환 위기가 찾아왔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보다 훨씬 더 정보가 넘쳐나고 또 너무 과도하게 많아서 무엇을 수용해야 할지 알기 힘든, 스스로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시대다. 만듦새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을 차치하고라도, <국가부도의 날>은 다행스럽게도 스스로 대답하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의미 있는 영화는 그 자신이 메시지가 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그 영화가 끝나고 나서 관객 각자에게 무엇인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게 만든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메인 포스터

<국가부도의 날>(2018), 최국희 감독

2018년 11월 28일 개봉, 114분, 12세 관람가.


출연: 김혜수, 유아인, 허준호, 조우진, 뱅상 카셀, 김홍파, 엄효섭, 송영창, 권해효, 조한철, 류덕환, 박진주, 장성범, 전배수, 한지민, 이호재 등.


제작: 영화사 집

배급: CJ엔터테인먼트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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