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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Dec 12. 2018

차근차근 천천히. 삶에 대한 잘 만든 다큐멘터리의 모범

영화 <인생 후르츠>(2017)

<인생 후르츠>(2017)는 결혼 후 65년을 함께한 노부부의 삶의 궤적을 곁에서 지켜보며 전하고자 하는 바를 계절이 흐르듯 담아내는 작품이다. 두 사람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쌓아올리고, 작품 전체가 집약하고 있는 철학이 결국 주인공의 인생과 맞닿아 있는, 잘 만든 다큐멘터리의 모범이다. 게다가 작 중 내레이션 혹은 츠바타 부부의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인용구나 이야기가 탁월하게 영화의 결과 조화된다.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컷


"소원을 하나씩, 그대로 이루어주는 요정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
"모든 답은 위대한 자연 속에 있다."
(안토니오 가우디)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
(르 코르뷔지에)
"오래 살수록 인생은 더 아름다워진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차근차근, 시간을 모아서 꾸준히."
(영화 속 츠바타 슈이치의 메모)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컷


영화로 비춰지는 츠바타 슈이치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철학을 가족과 지역 사회가 공감하고 함께하게 만들면서 그 자신은 프로젝트가 일정 궤도에 오르면 전면에 나서거나 스스로를 부각시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인생 후르츠>의 내레이션 역시 그 역할을 담당하는데, 키키 키린의 목소리를 빌리고도 영화의 내레이션은 스스로 서술자가 되거나 작품에 개입하는 일이 없다. 간단한 메시지를 알맞은 리듬으로 반복하거나, 혹은 이야기가 끝나고서야 스스로의 어조를 변화시킨다.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컷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키키 키린의 내레이션)


보기 전에는 간단하지만 일면 추상적으로 다가왔던 '인생 후르츠'라는 제목은 작품을 보고 나면 그보다 완전히 이 다큐멘터리를 표현할 말이 없다고 여기게 만든다. 인간적인 삶은 무엇일까, 라는 영화 스스로의 물음. 여느 좋은 영화가 그렇듯 <인생 후르츠>는 결코 스스로 답 내리지 않는다. 다만 하나씩, 걷는 듯 천천히 보여줄 따름이다. 발터 벤야민의 문장에다 한 마디를 덧붙여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요정은 자연 속에서만 살 것입니다"라고.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컷


아, 영화 <인생 후르츠> 속 슈이치 할아버지의 일상을 보면서 가장 주목한 건, 그가 어디에든 무엇이든, (스스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수십 종의 채소와 과일이 심긴 텃밭에 각각 무엇이 있는지를 적어놓은 팻말, 어딘가에는 밟지 말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 또 어디에는 작은 새들에게 "마시다 가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수반 옆 팻말. 능소화 옆에는 그냥 '능소화'가 아니라 "능소화 꽃의 터널", 잼을 만들 과일 곁 팻말에는 "마말레에드가 될 테야" 같은 다정하고 귀여운 말들이 적혀 있다. 이웃 상인들과 주민들에게 매일 몇 통의 엽서를 직접 전하는 반복된 일상 속에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같은 인사말 옆에 그 음식의 그림을 그려놓는 재치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설계도면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늘 가까이하는 종이와 펜과 채색 도구들. 그는 아내와 함께 살 집을 좋아하는 건축가의 디자인에 영감을 받아 직접 설계하고 지어 거기서 40년을 살았고, 창호지를 새로 붙이거나 하는 일에는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고 (아내와 함께) 직접 한다. 무언가를 할 때는 아내에게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묻는다.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인 동시에, 골똘히 생각하고 차분히 말하고 꾸준히 쓰는 사람. 그와 같이 살아야겠다고 느꼈다.



영화 <인생 후르츠> 국내 메인 포스터

<인생 후르츠>(Life Is Fruity, 人生フルーツ, 2017), 후시하라 켄시 감독

2018년 12월 6일 (국내) 개봉, 90분, 전체 관람가.


출연: 츠바타 슈이치(본인), 츠바타 히데코(본인), 키키 키린(내레이션) 등.


수입/배급: (주)엣나인필름


*영화 <인생 후르츠> 국내 메인 예고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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