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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07. 2019

묵직하고 담담한 메시지를 남기는, 거장의 '인생영화'

영화 <라스트 미션>(2018)

1930년생으로 어느덧 90대의 고령에 접어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2005년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로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았을 때 수상 소감으로 이런 말을 했다. "제 어머니가 1993년에도 이 자리에 계셨는데 그때 겨우 84세셨습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96세이시죠. (...) 저는 여전히 소년(Kid)입니다. 여전히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 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열두 편의 영화를 더 연출했고, 바로 그 열두 번째 영화가 3월 14일 국내 개봉을 앞둔 <라스트 미션>(2018)이다. 북미에서는 지난 12월 개봉해 1억 달러가 넘는 자국 내 박스오피스를 기록한 바 있다.


영화 <라스트 미션> 스틸컷


90세 거장이 연기하는 87세 마약 운반원의 실화

그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평생 가족에게 잘못만 저질렀던 가장의 후회

자신의 잘못을 되돌리기 위한 마지막 선택

새로운 인생이 그를 기다리는데…

-시놉시스




영화에 대한 리뷰를 쓸 때 시놉시스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라스트 미션>만큼은 그것을 인용해야겠다. 단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10년 만에 주연과 연출을 겸한 작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라스트 미션>의 주인공 '얼 스톤'은 '레오 샤프'라는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기 이전에 곧 노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자체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하기 때문이다.


실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고 건강한 모습이지만, 작중 '얼 스톤'을 연기하기 위해 그는 외양이나 걸음걸이 등에 있어서 양계장에서 일했던 자신의 할아버지를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지쳐 보이는 걸음걸이와 뒷모습, 굽은 어깨, 느릿한 말투. 그는 "내 연령대를 연기해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라고 연기에 나서게 된 계기를 밝히면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얼'에게조차도 시간이 있을지 모른다."라고 전했다. '라스트 미션'이라는 국내용 제목은 주인공 '얼 스톤'이 마약 운반책(The Mule)으로 위험한 일에 나서게 되는 것을 지칭함과 동시에, 그가 가족들과 오래도록 소원한 관계로 지내왔음이 영화에서 묘사되기에 늦게나마 소중한 사람들의 존재를 돌아보게 되는 과정을 함께 포함하는 제목이다.


영화 <라스트 미션> 스틸컷


'87세의 고령으로 멕시코 카르텔의 마약 운반원으로 일했던 사람이 있다'라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라스트 미션>은 'Based on a true story' 같은 자막을 서두에 띄우지 않는다. 연령대와 한 일 정도를 제외하면 가족 관계나 성격 등 대부분의 것들을 가공했기 때문인데, 공교롭게도 <라스트 미션>의 각본은 <그랜 토리노>(2008)의 각본을 쓴 닉 솅크가 맡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딸이자 배우인 앨리슨 이스트우드가 영화에서도 '얼 스톤'의 딸로 출연하며, <아메리칸 스나이퍼>(2013)로 인연을 맺은 브래들리 쿠퍼가 마약 단속국 요원으로 출연한다. 영화가 '얼 스톤'의 이야기인 동시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야기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이쯤 되면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을까. 어떤 영화는 곧 배우의 얼굴만으로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곤 하는데 이 영화 역시 그렇다.


영화 <라스트 미션> 스틸컷

주인공 '얼 스톤'은 오래도록 몸담아온 백합 원예 일이 쇠퇴하고 부인과 딸 등 가족과의 관계도 점점 멀어지던 중 우연한 계기로 '운전만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제안을 받는다. 그것이 마약을 은밀히 운반하는 일이었는데, 고령의 백인인 그는 실제로 '할배'라는 닉네임으로 카르텔 사이에서 불리며 고령의 백인이라는 점 때문에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는다. <라스트 미션>은 편견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는 영화이기도 하다. (주인공 '얼 스톤' 역시 흑인이나 동성애자 등에게 차별적인 발언을 거리낌 없이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라스트 미션>은 범죄의 잘잘못을 가리거나 인물의 행동을 윤리적으로 판가름하는 데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중반 이후 '얼 스톤'에게 찾아오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가 젊은 시절 소홀히 대했던 가족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고, 처음엔 돈벌이만을 위해 참여한 마약 운반일 역시 해야만 하는 어떤 동기가 생기기도 한다. 과거 그는 한국전쟁 참전 용사였고, 40개 주가 넘는, 거의 미국 전역을 자신의 트럭으로 다니면서 교통 딱지 한 번 뗀 적 없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The Mule'이 되기까지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을 영화 <라스트 미션>은 단 한 번의 플래시백 없이, 인간의 삶처럼 순행적으로 그린다. 배우이자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클래식한 연출은 군더더기 없으면서 정확하고, 서사의 흐름 역시 한눈팔지 않고 제 갈 길을 단단하게 걸어간다.


영화 <라스트 미션> 스틸컷
영화 <라스트 미션> 스틸컷
영화 <라스트 미션> 스틸컷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마약 카르텔의 지시에 아랑곳하지 않고 숨은 '샌드위치 맛집'을 찾아가는 그는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를 보낼 줄 모른다든가, 감시책이 마약 운반을 하는 자신을 따라오든 말든 컨트리송을 차 안에 틀어놓고 따라 부른다든가 하는 모습들을 통해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을 누그러뜨린다. 아니, 적지 않은 대목에서 웃으면서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잠시 로버트 레드포드의 연기 은퇴작인 <미스터 스마일>을 떠올렸는데, <라스트 미션> 역시 어둡거나 무거운 영화가 아니지만 주인공의 인생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아내기에 부족하지 않다. 혹은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가는 것에만 관심 있는 영화다. 거장의 생생한 주름만큼이나, 당당한 뒷모습이기도 하다.


마약을 은밀히 운반하는 일을 통해 '얼 스톤'은 매번 거액을 손에 넣는다. 돈봉투를 열어보는 본인 역시 놀랄 만큼. 그러나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잊어버리기 쉬운 것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다면 시간이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다. 처음에 가볍게 시작했던 마약 운반 일은 실어 나르는 마약의 무게가 늘어나는 만큼 점점 위험해지고, 마약 단속반의 수사망 역시 점차 범위를 좁혀 온다. <라스트 미션>의 '얼 스톤'이 영화 속에서 하게 되는 '마지막 선택'은 관객들 저마다의 삶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 메시지는 저마다 달리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으리라. <라스트 미션>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작 중 가장 뛰어난 영화라 칭하기는 어렵겠지만,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거장의 '인생영화'라고 말해보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영화 <라스트 미션> 국내 메인 포스터

<라스트 미션>(The Mule, 2018),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2019년 3월 14일 (국내) 개봉, 116분, 15세 관람가.


출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타이사 파미가, 브래들리 쿠퍼, 다이앤 위스트, 마이클 페나, 로렌스 피시번, 앨리슨 이스트우드, 앤디 가르시아 등.


수입/배급: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영화 <라스트 미션> 스틸컷

(★ 8/10점.)

*메가박스 코엑스 관람(2019년 3월 5일)

*<라스트 미션> 메인 예고편: (링크)

*본 리뷰는 워너브러더스코리아㈜로부터 시사회 초대를 받아 영화를 관람한 후

금전적 지원(원고료) 없이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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