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이스>(2018)
영화의 의미 혹은 기능 중의 하나로 동시대의 가치 혹은 가치관을 담아내는 일을 이야기한다면 아담 맥케이의 <바이스>(2018)는 예시로 들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미국 부통령 딕 체니의 일대기를 그려낸 실화 기반의 영화, 정도로는 <바이스>의 일부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스스로 '전기 영화'로 분류되기를 원하는 것 같지는 않으나, <바이스>는 단지 한 사람의 실존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단서를 제공한다. (영문 포스터에는 'The Untold True Story That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바이스>는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에 관하여,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권력을 휘두른 부통령이 된 '딕 체니'(크리스찬 베일)에 관하여, 1963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여러 순간들을 수시로 오가며 설명하는 영화다. 수많은 내레이션이 등장해 글자 그대로 '설명하는' 영화인데, 대사량과 정보량이 쉴 틈 없을 만큼 많지만 관객이 따라가는 데 큰 무리가 없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포장할 줄도 안다. 단지 정치권력 내부에서 벌어지는 담화들을 넘어 다소 무거운 주제도 포함되어 있지만 어디까지나 상업 영화로서, 대중 영화로서의 틀을 잃지 않는 솜씨 역시 놀라울 따름이다.
영화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면 하나는 '엔딩 크레딧 1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영화 시작 후 약 50분 정도에 등장하는 이 크레딧은 당연히 진짜 엔딩 크레딧이 아니며 캐스트의 일부를 보여주다 다시 영화로 돌아간다. 그의 앞에는 자막을 통해 마치 '딕'과 '린 체니'(에이미 아담스)가 정계를 떠나 평온한 삶으로 돌아간 것처럼 서술하는 대목이 포함된다. 여기까진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지도 않은, 말하자면 워밍업이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관계된 여러 인물들 - 이를테면 9/11 발발 직후 비상 회의에서의 주요 실무자들, 부통령을 포함해 국무장관, 국방장관 등 - 의 모습을 빈번하게 정지 화면으로 포착하며 자신의 이야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 친절하게 짚어주는 걸 잊지 않으면서도, <바이스>는 내용을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의 흔적을 역력하게 보여준다. 가령 (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정의하기 위한) 헌법의 해석을 두고 '딕'을 중심으로 관료들이 논의하는 대목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 메뉴를 정하는 모습에 빗대어 소수의 인물들이 국가와 세계를 주무르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포장한다.
앞서 표현한 '엔딩 크레딧 1부'를 전후로 앞에서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던 '딕 체니'가 어떻게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는지를 담았다면 뒤의 내용은 그가 어떻게 부통령의 자리에 올랐는지를 따라가는 내용이다. 비록 지금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의 허상이 일부 드러나 있기도 하지만, "우리는 존나게 최선을 다했다"(We did our fucking best.)라는 영화 도입의 자막이 직전 문장에 언급하듯 베일에 싸인 '딕 체니'의 의중과 계산에 대해 영화는 (어느 정도의) 실화를 기반으로 하되 자신의 이야기를 단지 서술하기만 하지 않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전할 수 있는지를 잊지 않는다.
가령, 과거 음주운전을 했을 때, 뒤치다꺼리에 지친 여자 친구 '린'이 말한다.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새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자신을 떠나라고. 바로 그때의 '딕 체니'의 결정. 그리고 '조지 W. 부시'(샘 록웰)로부터 러닝메이트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딕 체니'의 스스로의 결심을 앞둔 내면의 복잡한 계산. 이해와 계산을 두고 '딕 체니'를 비롯해 '도널드 럼스펠드'(스티브 카렐)와 '콜린 파월'(타일러 페리) 등 핵심 인물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는지. <바이스>는 한 편의 거대한 정치 드라마이면서 지금 이 순간 지구 반대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나아가 한 사람의 사소한 결정, 발언, 행동 하나가 그 사람의 주변을 넘어 지역 사회, 국가, 그리고 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 친절하고 대담하며 유쾌하고 신랄한 영화는, 할리우드의 최전선에서, 그리고 콘텐츠 바다의 깊숙한 곳에서, 지금 나올 수 있는 가장 매끈하게 잘 빠진 영화다.
<바이스>(Vice, 2018), 아담 맥케이 감독
2019년 4월 11일 (국내) 개봉, 132분, 15세 관람가.
출연: 크리스찬 베일, 에이미 아담스, 스티브 카렐, 타일러 페리, 샘 록웰 등.
수입/배급: 콘텐츠판다
*브런치 무비패스(2019.03.27. CGV 용산아이파크몰)
*CGV 무비핫딜(2019.04.02. CGV 용산아이파크몰)
*<바이스> 예고편: (링크)
(★ 9/10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