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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pr 11. 2019

'어메이징 에이미'에 맞설, '어메이징 닉'의 탄생

영화 <나를 찾아줘>(2014)와 소설 『나를 찾아줘』

알고 봐도 재밌는 영화


길리언 플린의 장편 소설 『나를 찾아줘』(Gone Girl, 2012)와 이를 원작으로 데이빗 핀처가 연출한 영화 <나를 찾아줘>(2014)는 얼핏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다. 소설을 영화로 옮겨오면서 각색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전반적인 줄거리에 있어서는 크게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각색되었기에 소설을 이미 읽은 사람에게도 호평받는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본 글에서는 주로 작가의 서술 방식의 차이를 중심으로 <나를 찾아줘>의 각색 특징을 살펴보려고 한다. 영화를 먼저 감상한 후 소설을 읽었다. 영화나 소설 중 어느 하나 이상을 읽거나 본 경우에만 나머지를 읽길 권한다.


하나 참고할 점은 데이빗 핀처 감독은 그간 자신이 연출을 맡았던, 원작이 있는 영화에서와 달리 <나를 찾아줘>에서는 원작을 쓴 길리언 플린에게 영화의 시나리오도 맡겼다는 점이다. 이 점은 작가가 원작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시나리오를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될 수 있지만, 오히려 원작에서 작가가 중요한 부분이나 자신이 의도했던 바를 잘 살릴 수 있다는 장점이 될 수 있다.


영화 <나를 찾아줘> 스틸컷


에이미 부각하기


소설은 문자 매체이므로 읽으면서 독자가 상상을 해야 한다. 이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지금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을까. 그래서 독자를 배려하기 위해 인물의 심리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한다. 영화는 그렇지 않다. 인물의 표정을 직접 보여주기에 그 심리도 어느 정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소설에 비하여 영화에서 표현된 인물의 성격과 심리의 차이에 대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화에서는 '에이미'(로자먼드 파이크)에 대적하는 '닉'(벤 애플렉)의 진가가 조금 덜 발휘되어 있고, '에이미'의 행동은 그에 반해 더욱 소름 끼치게 그려져 있다. 말하자면 영화에서보다 소설에서의 '닉'은 좀 더 (어메이징 에이미에 대적할) 영민한 ‘어메이징 닉’에 가깝다.


벤 애플렉이 연기한 '닉'은 한층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다. 미주리의 한때의 영광을 상징하는 폐허 된 쇼핑몰을 '닉'의 가족과 일행이 수색하는 신이 있는데, 영화에서는 이 행동의 주체를 '닉'이 아닌 형사 '보니'(킴 디킨스)로 바꿔버린다. '에이미'는 '그레타'(롤라 커크)와 '제프'(보이드 홀브룩)로 인해 찾아온 예상치 못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데지 콜링스'(닐 패트릭 해리스)라는 인물을 이용하는데, 영화에서는 '에이미'가 '데지'를 죽이는 부분을 더욱 실감 나고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커터칼에 대한 묘사를 강화하고, 수면제 이야기는 아예 제외했다.


반면 '에이미'가 5주년을 맞아 남긴 단서의 내용과 의미는 축소되어 있다. 소설에서 ‘닉이 에이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 '에이미'가 단서와 함께 남긴 편지가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닉'이 '앤디'(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와 바람을 피운 것에 대한 응징으로서의 단서들이 부각되고 있다. 이밖에 많은 부분에서 영화는 '닉'을 중반까지는 '에이미'가 남긴 덫에 이끌리기만 하는 무기력한 인물로 그리고, 중반 이후의 '에이미'를 훨씬 더 냉소적이고 치밀한 인물로 그림으로써 관객에게 좀 더 강한 충격과 서늘함을 선사한다.


영화 <나를 찾아줘> 스틸컷


더욱 극적으로 활용된 미디어


이 작품에서 '닉'과 '에이미' 두 사람의 이야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둘을 바라보는 언론과 이에 영향받는 대중들의 시선이다. 영화에서는 언론에 희비가 엇갈리는 대중들의 모습을 좀 더 극적이고 냉소적으로 비추고 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말이다. 우선 '닉'이 ‘더 바’를 찾아온 기자와 인터뷰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빠져 있다. '샤론 쉬버'(샐라 워드)와의 인터뷰를 더 부각하기 위해서다. 이밖에 '닉'의 몇몇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를 영화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엘렌 에보트'(미시 파일)로 인해 아내를 죽인 살인마가 된 '닉'의 이미지, 그리고 '샤론 쉬버'로 인해 잘못을 뉘우치고 아내가 돌아오길 기원하는 남편의 이미지가 그래서 더 명확하게 대비된다.


더불어 '닉'을 변호하는 '태너 볼트'(타일러 페리)의 역할도 영화에서 좀 더 영향력 있게 다루고 있다. 이를테면 인터뷰에 앞서 '닉'이 실수할 때마다 젤리빈을 던지며 '닉'의 말투와 행동을 ‘교정’하는 신과 같은 것들이 더 구체적이고 흥미롭게 그려진다. "엘비스가 미주리에 행차하셨다" 같은 '태너 볼트'를 바라보는 '닉'과 '마고'(캐리 쿤)의 대화 같은 것들도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다. 전체의 이야기를 '닉'과 '에이미' 두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국한하는 대신, 이 사건에 언론을 더 깊숙하게 개입하게 함으로써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이 사건의 향방을 지켜보는 대중의 한 사람처럼 만드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언론의 역할을 부각하는 동시에 '에이미'의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을 더욱 무능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돌아온 '에이미'가 '보니' 형사가 아닌 다른 수사관에게 그간의 경위를 밝히는 대목이다. 대신 '에이미'는 '보니'가 계속 수사했다면 자신은 여전히 '데지'의 별장에 갇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한발 늦게 단서를 찾는 경찰의 수사력에 대한 냉소와 함께, 언론이 '에이미' 실종사건의 해결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을 (굳이 언론의 역할을 영화에서 강조하지 않고도) 부각하기 위한 장치다.


영화 <나를 찾아줘> 스틸컷


같은 결말, 다른 엔딩


서두에서 언급한 바, 영화와 소설의 큰 줄기는 같다. 소설의 목차처럼 ‘1부. 남자, 여자를 잃다’, ‘2부. 남자, 여자를 만나다’, ‘3부. 남자, 여자를 되찾다’ 세 부분으로 영화의 내러티브를 크게 나눌 수 있다. 하지만 관객에게 선사하는 경험은 서로 다른데, 몇 가지 부분에서 이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관객을 충격에 빠뜨리는 시점, 즉 '에이미'의 실체가 밝혀지는 시점이 소설에서보다 영화가 조금 더 빠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영화는 단순히 반전에 핵심을 둔 스릴러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끝나야 했다. 닉에게 헌신하고 그와 함께 안정감을 느끼고 그와 함께 행복해하면서 나는 '진짜 에이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훨씬 더 나은 여자고, '쿨한 에이미'보다 더 흥미롭고 복잡하고 도전적이었다. 그럼에도 닉은 '쿨한 에이미'를 원했다. 상상할 수 있는가? 마침내 당신의 진실한 자아를 당신의 배우자이자 소울메이트에게 보여줬더니 그가 당신을 싫어한다. 그렇게 처음으로 증오가 싹텄다. 나는 이 문제를 아주 오래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길리언 플린, 『나를 찾아줘』, 강선재 옮김, 푸른숲, 2012, 347쪽.


영화에서는 주로 위의 부분이 '에이미'가 치밀한 복수 계획을 세우게 된 계기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도록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즉 영화를 본 관객은 '에이미'를 단지 복수를 꿈꾼 악녀 혹은 사이코패스 정도로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에이미'가 행동에 나선 계기를 복합적으로 다룬다.


영화 <나를 찾아줘> 스틸컷


일례로 에이미는 자신의 부모가 만든 <어메이징 에이미> 시리즈를 위한 허울뿐인 모델로 자라왔다. 독자들이 사랑하는 첼로 신동 에이미, 발리볼 간판스타 에이미, 애완견을 사랑하는 에이미 등으로 책에서 그려지기 위한 모델이었을 뿐이다. 영화에 직접 묘사되지 않지만 에이미는 이것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신탁 자금을 부모가 가져간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 데지를 이용했던 에이미가 결국 닉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자신이 (실제로든, 혹은 자신이 그렇게 느끼든 간에) 닉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고 결혼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영화에는 빠진, 소설의 결말부에서의 ‘6주년 결혼 기념일’이다. 이제 닉은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헌신하는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다. 에이미가 바란대로 말이다.


'에이미'가 결국 '닉'에게 돌아갔다는 결말 자체는 같지만 관객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같지 않다. 영화에서는 '닉'과 '에이미'가 결국 서로를 서로답게 해 주는, 서로를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대상으로 상대방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에이미'는 '샤론 쉬버'와의 인터뷰를 보고 '닉'만큼 자신을 알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닉'은 '에이미'가 있어야만 ‘더 바’를 운영할 수 있고 자신의 의존할 대상이 생기기 때문에 그렇다. 소설에서는 단순한 안전뿐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를 상대로 하는 게임을 즐기고 서로가 그것의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끝이 난다.


영화 <나를 찾아줘> 스틸컷


어메이징 에이미에 맞설 ‘어메이징 닉’의 탄생


영화 <나를 찾아줘>와 소설 <나를 찾아줘>는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일궈낸 결혼생활이 그들의 바람처럼 행복하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 우리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 사실 잘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공유한다. 소설에서는 닉과 에이미 두 사람의 심리가 더욱 상세하게 묘사됨으로써 두 사람의 (경우에 따라서는 다소 웃기게 비치는) 심리 변화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둘 사이에 끼어든 언론의 영향력을 더 극적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에이미라는 인물로 인해 전달되는 충격과 스릴감을 강화하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반전이 후반이 아닌 중반에 일찍 드러나지만, 영화와 소설 모두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 관객과 독자를 긴장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잃지 않고 짜임새 있게 이끌고 간다는 점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소설에 비해 영화에서 이야기를 조금 더 빠른 시점에서 마무리하면서 도입부와 대비되는 수미상관의 구조까지 완성했다는 점은 특히 탁월하다. 데이빗 핀처가 만드는 스릴러에서 장인의 솜씨를 느낄 수 있는 이유다. 과정의 차이는 있지만 전반부 무력하게 살인 용의자로 몰릴 뻔한 닉이 에이미의 실체를 알고 난 후 에이미에 맞서 자신의 주도력을 되찾아가는 모양새는 비슷하다. 말하자면 ‘어메이징 에이미’와의 게임의 적수로 성장한 ‘어메이징 닉’을 만날 수 있는 치밀한 스릴러다. 과연 이 작품에서 비치는 것처럼 결혼은 그저 거짓된 행복을 위한 우울한 인생의 피날레일 뿐일까.


영화 <나를 찾아줘> 국내 메인 포스터


그렇다. 마침내 나는 에이미의 적수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그녀의 옆에서 잠을 깬 나는, 그녀의 뒤통수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녀의 생각을 읽으려고 애썼다. 그때만큼은 내가 태양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는 아내와 같은 수준의 광기에 다다르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나를 다시 바꾸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겁한 소년이었고, 그다음에는 좋거나 나쁜 남자였다. 이제 나는 마침내 영웅이다. 나는 우리의 결혼이라는 끝나지 않는 전쟁 이야기 속에서 응원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나는 그 이야기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젠장, 이제 나는 에이미가 없는 나의 이야기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녀는 나의 영원한 적대자다.

우리는 하나의 길고 무서운 클라이맥스다.

길리언 플린, 앞의 책, 637쪽.


(2014.11.16.) (단, 일부 소제목과 문장 및 맞춤법을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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