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인 사람들도 의견을 달리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가 있다. 이는 판사 역시 사람이므로 가치를 적용할 때 어느 정도의 다양성은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본 법정은 도덕이 아니라 법을 다루는 장소이며 우리 앞에 놓인 유일무이한 상황에 맞는 적절한 법리를 찾는 것이 우리의 과제요,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에서 (민은영 옮김, 한겨레출판, 2015)
이언 매큐언 소설 『칠드런 액트』는 숫자로만 챕터를 구분하고 있다. 그중 첫 번째 챕터는 이렇게 끝난다. "여섯시 반에 자명종이 울리자 피오나는 벌떡 일어나 앉아 잠시 어리둥절한 상태로 침대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욕실로 들어가 법정에서 하루를 보낼 채비를 시작했다." 엠마 톰슨이 연기한 주인공 '피오나'는 고등법원 판사다. '피오나'의 결혼생활에 대한 문제와 그가 맡는 사건의 판결에 관한 문제를 오가며, 원작자 이언 매큐언이 직접 각색한 영화 <칠드런 액트>(2017)는 105분이라는 짧은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피오나'의 훌륭한 내면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언 매큐언은 자신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체실 비치에서>(2017) 역시 직접 각색했다.)
(영화 <칠드런 액트>의 원작 소설 역시도, 『속죄』에 비하면 분량 자체가 짧은 편이기는 하다.)
영화 <칠드런 액트> 스틸컷
철학교수인 남편 '잭'(스탠리 투치)은 "우리의 결혼 생활이 예전 같지 않다"라며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는 거의 영화 후반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피오나'가 당면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의 장문의 판결문을 '피오나'는 직접 쓰면서 몇 번을 점검하고 수정한다. 그러다 맡게 되는 이른바 '여호와의 증인 사건'이 영화 <칠드런 액트>가 '피오나'의 심리를 묘사하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이슈가 된다. 백혈병을 앓는 열일곱 소년이 촌각을 다투는 위중한 병세에 놓여 있다. 병원에서는 그에게 수혈을 하고자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부모는 종교적인 이유로 아들의 수혈을 거부하고, 병원 측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수혈을 허가해달라는 청구를 한다.
1989년에 제정된 영국의 아동법은 법정이 18세 이전의 미성년자에 관한 사건을 판결할 때 아동의 복지를 최우선적인 기준으로 삼도록 명시한다. 영화의 제목은 바로 그 법을 지칭한다. 본 사건의 주인공인 '애덤'(핀 화이트헤드)은 아직 18세가 되지 않았기에 법적인 자율권을 갖고 있지 못하다. 한데 부모만 그런 게 아니라 '애덤' 본인 역시 수혈을 거부하는데, 이는 본인의 주체적 결정인가, 아니면 부모의 영향에 따른 결정인가?
영화 <칠드런 액트> 스틸컷
영화에서 본 사건에 앞서 언급되는, '피오나'가 판결하는 사건이 하나 더 있다. 생명이 위중한 샴쌍둥이의 분리 수술에 관한 것인데, 이 일 역시 생명을 대하는 종교적 신념과 두 쌍둥이 중 한 명을 살릴 수 있다는 주장이 충돌한다. 태어날 때부터 두 쌍둥이 '매슈'와 '마크' 중 한쪽은 호흡 등 생명에 문제가 없지만 다른 한쪽은 몸을 공유하는 다른 한쪽에게 의지하고 있으며 죽어가고 있다. 이때 분리수술을 하지 않아 두 아이 모두를 죽게 하는 것과,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덜 나쁜 것'인가? <칠드런 액트>에서 '피오나'가 맡는 일들은 이렇듯, 최선을 택하는 일이라기보다 '차악'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다. 서두에 인용한 원작 소설의 대목처럼, 인간의 신념과 존엄성, 그리고 생존 사이에서 과연 어느 한쪽을 명확히 무시하거나 어느 한쪽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는가? '피오나'와 '잭' 부부 사이에 자녀가 없다는 점, 그리고 앞서 소개한 17세 소년 '애덤'의, '피오나'의 어떤 결정 이후 나타나는 행동은 영화 <칠드런 액트>의 훌륭한 양대 축이 된다.
영화 <칠드런 액트> 스틸컷
소설과 영화 모두, 첨예하게 대립되고 명확히 어느 한쪽의 손만 들어줄 수는 없는 어려운 문제를 두고 '어떤 하나의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어떤 하나의 결과'로 이어진다. 영화는 스탠리 투치, 핀 화이트헤드 등 좋은 배우들이 함께하지만 무엇보다 엠마 톰슨이 이 역할에 얼마나 탁월하게 어울리는지를 상영시간 내내 증명한다. 그러나 '피오나'의 선택, 혹은 <칠드런 액트>의 선택은 그 자체로 스스로의 판단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뛰어난 대답을 하는 영화보다 더 좋은 영화는, 좋은 질문을 하는 영화다. 그리고 영화 <칠드런 액트>는 바로 그 질문을 관객에게 전하는 영화다. 직업적이고 전문적이며 딱딱할 것만 같은 '판결문' 같은 문서에도 온갖 개인사와 드라마가 개입된다. 이언 매큐언은 그 점을 훌륭하게 포착했고, 영화 역시 원작을 충실히 계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