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2018)은 성별에 근거한('On the Basis of Sex') 차별이 위헌임을 최초로 공표한 재판인 이른바 '찰스 모리츠 사건'을 중심으로 미국의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의 삶을 극화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각본을 쓴 다니엘 스티플만이 루스 긴즈버그의 조카라는 점인데, 루스의 남편인 마틴의 사후부터 약 1년 6개월간 자료를 수집하고 초고를 썼다는 것. 그 과정에서 물론 루스 긴즈버그 본인의 자문을 받기도 했고, <세상을 바꾼 변호인>의 하버드 로스쿨 입학을 시작으로 찰스 모리츠 사건의 변론을 맡기까지의 과정을 비교적 연대기 순으로 차분하게 따라간다.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스틸컷
'루스 긴즈버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불과 몇 개월 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2018, 원제 'RBG)를 참고하면 좋겠다. 오늘날 사라졌으나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수많은 '성별에 기초한' 차별 조항들이 철폐되거나 수정될 수 있었던 계기가 수백 건의 성차별 사건들을 변호한 루스 긴즈버그의 공로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그의 삶을 충실하게 극화했는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국내 관객들에게는 다큐멘터리가 이미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드라마 버전의 영화는 자신만의 차별성을 드러냈는가. 결론적으로는 일정한 완성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다큐멘터리에 비해 더 나은 점을 찾기는 어렵다. 요컨대 이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한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무난하지만 드라마틱한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고 해야겠다. 시나리오 자체보다는 연기와 미술 및 음악이 좀 더 긴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 역시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를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우선 영화 전체의 구조는 '모리스 사건'을 중심으로 삼으면서도 펠리시티 존스가 연기한 '루스 긴즈버그'의 삶에 대해서 주요 에피소드를 뽑아 병렬적으로 다룬다. 영화를 보는 관객 모두가 걸출한 다큐멘터리 <RBG>를 보았거나 혹은 루스 긴즈버그에 대해 잘 알고 있지는 않을 것이므로 이 선택은 옳다. 그렇다면 이 선택은 효과적인가. 영화에 의하면 '모리스 사건'을 루스가 처음 알게 된 것은 남편인 '마틴'(아미 해머)이 세법과 관련된 사건 중 하나로 정보를 제공한 덕분이다. 우연히 이것을 알게 된 '루스'는 이 사건이 '남성에 관한 역차별'을 알림으로써 성차별 자체가 위헌임을 일깨울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틴'은 본인도 법조인이면서 아내 '루스'가 자신의 커리어를 펼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지지와 조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 점은 '루스'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그러나 영화의 이야기는 '리드 대 리드 사건'(미국 수정헌법 제14호의 평등 보호조항을 법이 여성을 차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최초로 적용한 사건)을 비롯해 루스의 딸 '제인'(케일리 스패니) 등 주변 인물과 곁가지 사건들을 아우르면서 전체적으로 '루스'의 후반부 5분가량의 변론 장면에 기대는 형국이 된다. 이미 실존 인물에 대해 충분한 사전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한 초중반의 연출은 고전적이고 동시에 일관된 몰입을 이끌지 못한다. '루스'와 주변인 사이의 관계나 주변으로부터 전해지는 사건들에 소홀하지 않는 선택이 오히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이룬 인물인지를 조명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할까.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스틸컷
영화의 첫 장면인 하버드 로스쿨 입학식 신에서 흘러나오는 곡 'Ten Thousand Men of Harvard'는 하버드 대학교의 대표적인 응원가 격인데 (체육대회 등 대학 대항전에 쓰이는) 이 곡의 장악력은 '루스' 본인이 여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동기 전체 중 불과 9명) 현장에서 느끼는 위압감을 충실히 반영한다. 여기서부터 이미 "자리 있어요?"라는 '루스'의 말에 싸늘하게 반응하는 남성 동기의 표정을 주의 깊게 담아냄으로써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루스'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남성들의 고압적, 차별적인 시선을 매 순간 감내해야만 했음을 내비친다. 그러나 이 '시선'은 너무 많이 쓰인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리고 법정에서도. 같은 영화 언어는 한 영화 내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면 그 힘이 떨어진다. 모리스 사건의 변론 중 상대측 변호인의 표정, 판사의 표정, 하버드 로스쿨 학장의 표정 등. 이는 비단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당대의 여성을 향한 모든 남성, 즉 기득권층의 시선과 태도를 대변하므로 <세상을 바꾼 변호인>만의 효과적인 작법이라 보기 어렵다.
자, 그럼에도 장점도 있는 영화다. '루스'의 딸 '제인'의 캐릭터가 단역에 그치지 않고 일정한 비중의 조연에 등극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더욱이 그가 남성 건설노동자의 성희롱 발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페미니스트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연설을 들으러 가는 등의 행동은 여러모로 <세상을 바꾼 변호인>이 단지 '루스'의 삶을 보여주기에 머무르지 않고 후대 여성들의 삶에 응원을 전하려 했음을 느끼게 한다. 미하엘 다나가 작곡한 영화음악은 크게 귀족적이고 고전적인 테마의 남성적이고 보수적인 느낌을 주는 스코어와 일종의 (새로운 세상을 향한) 변화의 의지나 흥분감을 주는 좀 더 생기 있는 템포의 스코어로 구분돼 영화의 메시지를 강화한다. 또한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던 여성들의 의상 역시 연대별로 충분히 시대상을 반영할 수 있게끔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이를테면 불과 1970년대만 해도 여성들은 '바지'를 자유롭게 입을 수 없었다.)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스틸컷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스틸컷
<세상을 바꾼 변호인>의 시나리오는 '아직 집필되지 않은 뛰어난 시나리오'를 일컫는 '블랙리스트'에 올랐었음에도 그 자체로는 연기나 미술 등의 공이 없었다면 비교적 평범한 각본으로 다가온다. 가령 '루스'가 로스쿨에서 다른 학생들이나 교수들에게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홀대받는 장면 이후에 곧장 지인이나 친구들과 몸으로 설명하는 단어 퀴즈 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 식의 전개는 이야기 자체의 흐름보다는 편집이 주는 완급 조절의 효과에 기댄다는 인상을 준다. 진취적이고 입지전적인 위인을 담아내는 데 있어 무난하고 안정적인 작법이 그 자체로 단점은 아니겠으나 이미 다큐멘터리를 본 입장에서는 드라마 버전의 (오히려 다큐멘터리가 더 '드라마틱'하게 보이게 하는) 영화를 봐야만 하는 매력도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할까.
다만 (영화 초반) 하버드 로스쿨 입학식이 열리는 장소로 처음 향할 때의 '루스'를 보여주는 카메라 워킹과, (영화 후반) 변론이 끝난 후 재판장을 나설 때의 '루스'를 보여주는 카메라 워킹은 마치 수미상관을 연상케 하는 나름의 완결성을 획득한다. 초중반의 서사가 그리 큰 몰입감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후반 이후, 특히 실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잠깐 화면에 잡힐 때의 그 탄성은 120분이라는 길지 않은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다소 무난하게만 여겨졌던 각본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아니, 관객은 '제인' 역시 콜럼비아대 로스쿨 교수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되므로, 유의미하게 비치는 '제인'의 마지막 신은 다음 세대를 위해 이야기 하나를 더 남겨두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비록 '성별을 근거로 하는' 차별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이 사회에는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만 하는 불합리한 일들이 잔존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어져온 것이라 해서 그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연민하고 공감할 줄 알면서도 주어진 상황에 대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일 줄 아는 판단은 지금 이 시대에도 중요한 울림을 준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일명 'RBG'의 존재가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북미 포스터
<세상을 바꾼 변호인>(On the Basis of Sex, 2018), 미미 레더 감독
2019년 6월 13일 (국내) 개봉, 120분, 12세 관람가.
출연: 펠리시티 존스, 아미 해머, 저스틴 서룩스, 샘 워터스톤, 케일리 스패니, 캐시 베이츠, 스티븐 루트, 잭 레이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