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 리뷰
<비포 선셋>(2004)과 <비포 미드나잇>(2013)의 존재와 흐름을 이미 아는 채로 <비포 선라이즈>(1995)만의 이야기에 대해 온전히 생각하고 정리하는 일이 가능할까 하는 마음으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24년 전 모습을 다시 감상하게 되었다. 일종의 현장감이 살아 있는 즉흥적 대화처럼 보여도 <비포 선라이즈>의 이야기는 애드리브 없는 면밀한 각본을 기반으로 한다. '제시'와 '셀린'이 처음 관람차에서 입을 맞추는 순간은 영화의 거의 1/3 지점이며 강변의 시인을 만나는 대목은 영화의 1/2 지점을 관통하는 등 이야기 흐름으로 살펴도 특히 구조적으로 짜여 있다. 영화의 이런 각본이 우연한 사건도 그것이 계속되면 더 이상 우연이 아니게 된다는 깨달음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한데, 좁은 음악감상실에서 두 사람이 듣던 Kate bloom의 곡 'Come Here'의 노랫말을 생각하며 우연한 만남이 찾아왔을 때의 마음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셀린은 "너의 나쁜 점을 말해줄 사람을 내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제시와의 만남이 좋다고 했던 사람이다. 낯선 장소에서의 낯선 사람과의 대화란 그런 것이다. 가장 확실하게 서로를 모를 수 있는 순간, 다음날 아침이라는 시간의 제약과 만나 두 사람은 제한적으로만 서로를 알아가기로 한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사람에게 최선과 최악의 감정을 모두 줄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셀린의 말과 "우린 모두 서로의 악마이자 천사다"라는 제시의 말은 같은 마음을 서로에게 느끼는 두 사람의 언어다.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역할놀이를 하며 두 사람은 눈과 눈을 맞댄 채 "시간이 지날수록 걔가 점점 더 좋아져"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말은 상대가 좋아지는 과정에 상대에 대해 점점 더 깊이 알아가는 일이 포함돼 있음을 뜻한다.
앞에서 언급된 이야기가 뒤에 가서 한 번 더 등장하거나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 의해 반복되는 현상은 <비포 선라이즈>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예컨대 손금쟁이가 제시의 손을 잡았듯 와인 바의 주인 역시 제시의 손을 잡는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일' 역시 대부분의 삶에서는 두 번 이상 생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삶의 많은 것들이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관객 역시 알고 있으리라 짐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시간을 대상으로 지속하고 있는 일종의 영화적 실험은 반복될 수 없는 시간을 반복될 수 있는 무언가로 만드는 시도 같기도 하다.
9년마다 이어지는 후속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비포 선라이즈>에는 단 한 차례의 플래시백도 쓰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는 반복되지 않을지라도 공간은 재등장한다. 두 사람이 머물던 곳, 이야기를 나눈 곳, 함께 걸은 곳, 떨리는 눈빛과 마음의 울림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곳들. 공간에는 시간이 깃들고, 관객은 그 시간을 알고 있다. 단 하루의 이야기가 아주 오래고 긴 이야기로 다가오는 경험이 여기서는 그리하여 가능하다.
영화의 마지막 두 개의 숏은 카메라 기준 우측에 앉아 좌측을 응시하는 제시와, 좌측에 앉아 우측을 향해 시선을 둔 셀린의 모습이 마치 하나의 더 큰 숏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다가온다. 각자의 숏 사이, 즉 여백이 둘을 하나로 해석될 수 있게 하는데, '시도 안에 존재하는 대답'이나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신'처럼 <비포 선라이즈>는 단지 '다음날 해가 뜨기 전'이라는 한정적 시간만을 다루지 않고 '어제의 일출과 오늘의 일출 사이'를 다룬 영화라 해도 되겠다. '눈으로 사진을 찍는' 사적인 순간에도 제시와 셀린은 의식과도 같은 그 행동을 함께, 동시에 한다. 두 사람의 대화에는 그래서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요지의 말이 포함된다. 요컨대, 우연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지만 우연의 반복은 오직 서로의 존재를 특정한 사랑의 방식으로 인지한 두 사람에게서만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