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과연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이것에 관해 글을 쓴다면, 겪었던 사람들 중에 스스로의 기준에서 그렇다 여겨지는 사람들을 떠올려볼까? 막연한 단상에서 더 발전하지 않았다. 너무 그 사람(들)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가 담기지는 않을까? 그런 우려도 있었다. 타인과의 관계로 맺어진 내 일상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 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그러니까 지금 말하려는 주제는 '기꺼이 두 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소망이다.
직장 생활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거나 때로는 그렇지 않은 채로, 영화를 주제 혹은 매개로 삼아 소셜 네트워킹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크게는 영화를 함께 감상하고 사람들과 영화 이야기를 나누거나, 영화에 관해 글 쓰는 방법을 주제로 사람들에게 강의 형태로 내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는 것. 이것을 몇 년 하니 불특정 다수라고 할 수 있는 수십, 수백 명의 얼굴들과 이야기들을 만난다. 당연히 그들 중에는 한 번만 보는 얼굴도 있고 두 번 이상 만나는 얼굴도 있다.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이어지는 인연도 있다.
이 차이가 단지 우연과 불확실성의 산물이기만 할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건 모임이나 클래스 등을 준비하면서 그들에게 선사한 시간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에 대한 내 견해나 감상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거나 유익했는지, 더불어 콘텐츠만으로 전해지지 않고 '인간 김동진'이 담거나 풍기는 어떤 종류의 인상과 느낌이 그들에게 긍정적인 무언가를 전하였는지가 시간의 경험을 좌우한다.
한 번만 보게 되는 사람이 꼭 나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두 번째'를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첫 만남에 앞서서의 궁금증이 첫 만남 이후 두 번째를 향한 기대나 관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스스로에 대해 한 번쯤 돌아보는 일은 필요하다. 사후적 성찰은 물론 필요하기만 한 게 아니라 중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사람을 억지로 붙잡을 수야 없는 노릇이므로 내가 내린 나름의 결론은 첫 만남 이전에 준비를 성실히 하는 것이다. 영화 모임으로 말하자면 일단 진행자이자 발제자인 본인이 영화를 최소 세 번 이상 반복해 감상하고 여러 자료들과 리뷰, 비평을 훑으며 그 영화에 대해 어떤 화두를 나눌 수 있을지 대비한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앞서 말한 '인간 김동진'에 대해 인위적으로 꾸며내지 않은 채로 자연스럽고 알맞게, 긍정적이거나 호감을 살 수 있으려면 평소의 언행이 중요하겠다. 자신의 말과 행동은 그 내용과 모양만이 아니라 그것을 담는 '나'라는 그릇, 곧 화법이나 태도가 더 많은 것을 좌우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어떤 영화에 대해 내 생각을 전할 때 그게 대단한 것이거나 정답인 것처럼 굴지 않는다. 내가 준비한 모임에 참석한 이들의 소중한 시간을 소중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양질의 콘텐츠를 준비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스스로 뛰어난 영화 전문가인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오직 원하는 바는 '영화를 좋아하고 이야기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건 이렇습니다”보다 “제 생각에는 이렇게도 볼 수 있겠습니다” 하는 게 내게 알맞다. 하지만 이건 그릇일 뿐, 거기 무엇을 채울지에 관해서는 더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찾은 나름의 방법은, 그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열 가지 주제를 염두에 둔다고 할 때 한두 가지는 꺼내지 않고 반드시 아껴두는 것이다. 영화가 끝난 뒤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바로 그 한두 가지를 대부분 짚어준다. 그러면 나는 거기 맞장구를 치며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 감독의 코멘터리 같은 정보를 슬쩍 공유한다. 늘 온전히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매 순간 모임에 임하는 마음가짐이란 '말을 가능한 적게 하자' 같은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에 관해서라면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말하고 싶은 마음 역시 일종의 본성이므로 내 이야기는 자주 길어진다.
다행히도 시간은 한정적이고 (내가 고른 영화를 본)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상이 궁금하므로 '아, 내 얘기는 이쯤에서 끊어야겠다!' 싶은 성찰의 순간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그리하여 '저렇게 영화를 좋아하고 성실하고 알찬 대화거리를 준비해온 사람이 자기 말만 하지 않고 내 얘기도 잘 들어주네!' 하고 모임 참가자가 느낀다면 내 의도는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마침내 그 경험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또 들어보고 싶다' 하고 생각하며 모임이 끝난 후 내 인스타그램이나 브런치 계정을 검색해보는 순서로 이어지겠고...
모임 진행자로서의 이야기였지만 이건 물론 사석에서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잘 말하는 사람은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그렇다고 자기 이야기는 하지도 않고 상대방만 말하게 만드는 것도 그에게는 피곤한 일이다. 그러니 공유하고 싶은 취향과 관심사를 알맞게 꺼내 두고, 과하지 않은 선에서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하는 것. 나는 내 관심사에 탐닉하고 본인이 아끼는 대상에 골몰하기를 좋아하는 취향 애호가일 뿐, 아무 하고나 어떤 화제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만나는 순간 1분 만에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는 그런 붙임성 좋은 사교형 인간이라고 스스로 여기지는 않는다. 이야기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이 혼자 시간 보내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모순적인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이 사실이다.
일상이 혼자만의 것일 수는 없는 한 사람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이어가며 1인분의 삶 바깥의 세계를 경험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을 단 한 번만 만나는 일은 넓은 세상을 만나기에 부족한 것일 수밖에 없겠다. 나는 마음이 맞다고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두 번 이상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 번 만났을 때 '이 사람과 다음에 또 이야기 나누고 싶다'라고 여기게 되는 사람. 지금까지 스스로가 충분히 그런 사람이었는지 섣불리 평가할 수는 없고 그건 타인들만이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2019.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