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은 꽤 정직한 필기구다. 며칠만 쓰지 않아도 펜촉의 잉크가 굳는 일이 생기고 그러면 속을 열어서 물에 담가야 한다. 모든 글을 펜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펜으로 쓰는 모든 글을 만년필로 쓰는 것도 아니지만, 소모품이 아닌 소장품에는 곧 주인의 생활과 행동반경이 깃들기 마련이다. 배나무와 스테인리스 스틸이 같이 쓰인 이 15센티미터, 32그램의 펜은 단지 잉크를 담는 공간이기만 한 게 아니라 잉크를 움직이는 근육이기도 한 것이다.
작년 연말 이 펜을 살 때 카트리지도 동봉되어 있었지만 잉크병에서 잉크를 채워야 하는 컨버터를 써보기로 한 건 이 펜의 물성을 더 잘 알아 새기고 그에 맞게 물건을 대하고자 함이었다. 요즘 집에 오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펜을 꺼내놓게 된다. 책을 읽으려면 책을 가지고 다녀야만 하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쓰려면 쓸 것을 곁에 두어야만 해서. 다른 펜을 한동안 수리 맡겨둔 터라 (막 들고 다니는 펜 말고) 고이 챙기는 펜이 지금은 이것밖에 없기도 하다.
한때는 쓰는 글 절반 이상을 펜으로 먼저 쓰고 컴퓨터로 옮겼던 시기가 있다. 물론 시간이 남아돌았던 때여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도 실은 그렇게 하고 싶다. 넷플릭스에는 시즌을 완주하지 못한 드라마가 쌓여 있고 영화 한 편을 보는 일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요즘임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은 것들과 보고 싶은 것들이 머리와 마음 모두에서 맴돈다. (2019.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