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일상의 흐름에 적응하는 중
"일기장을 다 쓰면 버스에서 내린 기분이 든다. 그런데 일기장은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서 내려 준다. 애당초 목적지 없이 버스를 탔고, 기름이 떨어져 버스가 멈춰 서면 내리기 때문이다. 이따금 나는 허허벌판에 내린 기분이 든다. '여긴 어디지... 일단 새 버스가 오면 타자.' 엉덩이 아래 보따리를 깔고 앉아 기다리다가 다시 버스가 오면 탄다. 버스는 덜커덩거리며 어디론가 간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하염없이 간다. 일기장은 나를 알 수 없는 곳에 내려 준다. 이번에는 절벽이다. 나는 보따리와 함께 내린 뒤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그리고 또 간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제자리걸음인지 모르는 채 그냥 간다."
(문보영, 『준최선의 롱런』, 프롤로그에서, 6쪽, 비사이드, 2019)
일기장과 버스를 이야기하며 문보영 시인은 "이 책은 무너진 일상을 복구하면서 쓴 일기들이다."라고도 썼다. '프리랜서처럼 보이는 백수'로 일정기간을 지내는 동안 나는 마치 내 일상이 '무너져 있는' 상태인 것처럼 생각했다. 항상 티 내지는 않았지만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 대해 걱정했고 과거 어느 시점에 내린 어떤 결정이 결국은 잘못된 방향으로 혹은 닦아놓은 길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바퀴를 밀어온 건 아닌가 생각했다. 타협하는 법을 배워왔고 스스로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만('셀프 영업 꿈나무') 하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재능기부가 아니라 노동이며 노동은 반드시 그에 맞는 보상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새 일상에 적응해가면서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지만) 맞이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업무, 새로운 환경은 물론이며 몇 시 몇 분에 몇 번 칸에서 지하철을 타면 객차 안에 사람이 어느 정도의 밀도로 부대끼고 있더라 하는 경험적 단서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시간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시간에 참석했던 모임에 당일 참석 여부를 시계를 살피며 전전긍긍하게 되는 순간들. 소속과 안정에 관한 생각들. 영화 일과 영화 일이 아닌 일에 대한 생각들. 바뀐 계절과 동시에 찾아온 '연말'이라는 단어.
짧은 기간 커리어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고 그 생각들은 좋은 의미들로 향하는 중이다. (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얼마만큼의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기보다 그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고 커리어에 있어서도 한 가지 길만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는 것.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모르지만 나는 멈춰서 있지 않았고, 멈추지 않고 있다. 위축되고 작아져 있던 계절들을 지나 추운 계절에 다시금 어깨를 펴고 가벼운 주먹을 쥐고 있다. 어디로든 계속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모임을 진행하면서 '영화를 다양하게 많이 보는 것'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 있다. 그때 했던 답은 일천 편을 봐도 겉핥기만 한 사람보다 열 편을 봐도 생각하고 질문하면서 본 사람이 훨씬 더 깊고 넓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5년 전에는 한 달에 평균적으로 열 번은 극장에서 새 영화를 관람했지만 지금은 한 달에 다섯 번이면 '많이 본 편'에 속한다. 앞선 질문의 답을 여기에도 적용하자면 영화와 책을 이전처럼의 양으로 소화하지 못한다 해서 내 세계가 좁아지는 건 아닐 것이다. 당장 이번 주에만 에버노트 계정에는 스물다섯 개의 노트가 새로 만들어졌고, 분량으로 따지면 1만 5천 자 정도가 되는 길고 짧은 글들이 쓰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새 영화를 제대로 챙겨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글쓰기와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내 일상은 무너지지 않았음을 대변하는 것일지 모른다.
지금은 새로 제안받은 영화 모임의 구상을 정리하고 있다. 어쩌면 영화는 아직 정말로 시작되지 않았다. 내년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여기서 시작될 것이다. 무엇인가가 시작되는 줄도 몰랐던 많은 지점들을 지나, '가지 않은 길' 사이에서 어디로도 향하지 못하고 멈춰 있다고 느꼈던 많은 나날들을 지나,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고 동경한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게 가능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면서. (2019.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