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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an 11. 2020

숫자와 속도 뒤에 가려진
삶을 보라고 말하는 영화

영화 '미안해요, 리키'(2019) 리뷰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하기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사이트에 자주 들어갔다. '언제 어떤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주로 하루 이틀의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했는데, 내가 이용했던 사이트에서는 근무 희망지역과 날짜를 선택하면 그 조건에 맞는 공고를 볼 수 있었다. 눈여겨봤던 점은 예를 들어 당장 내일, 몇 시간도 남지 않은 아르바이트를 오늘 검색하면 지역에 상관없이 가장 많이 보이는 건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였다는 점이다. 주로 야간에 근무하는 택배 상하차 일은 지역마다 물류 회사마다 근무 방식이나 시간당 급여 계산 등 상세 조건이 다른데, 공고에서는 주로 "초보자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힘들지 않은" 같은 말들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 그 현장이 어떨지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늘 밤에 물건을 주문해도 빠르면 내일 아침이면 배송 완료가 가능한 세상에서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건 물류 인프라의 힘 내지는 세상의 발전, 속도와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당일 배송, 총알 배송과 같은 키워드 뒤에 가려진 사람들의 노고를 보려고 할 것이다. 물론 앞에서는 나도 경험해보지도 않은 상하차 이야기를 어렴풋이 기억하는 공고 내용만으로 이야기했을 뿐 개인사업자가 되어 특정 구역을 담당하는 택배 배송 기사의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빠름과 효율 뒤에는 반드시 타인의 고된 노동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면 단기 아르바이트도 개인 사업자 형태도 모두 가능하겠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컷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2019)가 바로 택배 배송회사의 기사로 일하게 된 주인공 '리키'(크리스 히친)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다. 나아지지 않는 형편과 채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직업을 찾던 '리키'는 그럴듯한 제의를 듣고 계약금과 배송용 밴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의 차까지 팔아 일을 시작한다.


<미안해요, 리키>의 도입은 암전된 화면 속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다. 물류회사 간부와 주인공 '리키'. 'Parcels Delivery Fast'라는 이름의 물류회사에서 한 지점을 담당하는 간부는 '리키'에게 이 일의 장점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데 말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업무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주로 '그럴듯한' 포장의 연속이다.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 "우리는 물류계의 애플, 삼성, 아마존을 꿈꾼다" 같은 말들에는 택배 배송 업무의 강도라든가, 회사 밴을 이용할 경우와 자신이 직접 밴을 마련할 경우의 비용 차이와 그 차이의 불합리함 같은 내용이 없다. 다시 말해 'Work for us'가 아니라 'Work with us'라고 말하는 것의 이면에는 소속되지 않는 대신 책임도 져주지 않는다는 내용이 숨어 있다.


가령 배송 상황을 실시간으로 조회할 수 있고 배송 경로까지 짜 주는 소형 단말기는 말하자면 '리키'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의 신적인 물건이다. 회사는 자유와 주체를 강조하지만 실은 모든 책임을 '개인사업자'인 기사들에게 떠넘긴다. 배송 사고가 발생했을 때 적용되는 보험에도 물론 이 '스캐너'는 빠져 있다.


'리키'는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마음대로 쉴 수도 없다. 자기 구역을 임시로 맡아줄 대체 기사를 구해야 하고 쉬기 위해 하루 100파운드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갖가지 이유로 벌점을 세 번 받게 되면 잘린다는 조건도 있다. 아들의 학교에서 부모를 호출해 가봐야 한다는 '리키'의 말에 회사 간부는 "너 말고도 네 명이 더 찾아왔었다"라면서 그 네 명의 사정을 브리핑 한 뒤 자신이 외부로부터 이 회사(지점)를 지켜주는 필요악의 수호자인 것처럼 포장한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컷

앞에서 말한 것들은 물론 '리키'가 일을 하면서 알거나 겪게 되는 것들이다. 초기 계약금과 밴 값이 적은 비용이 아니지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리키'는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하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물량을 소화해야 하는 무리한 근무 조건과 운전석을 2분 이상 비우면 경보음을 울리는 스캐너의 강압이나 다름없는 제약, 그리고 비협조적이거나 돌발적인 고객들과의 대면 속에서 먼저 체력적으로 지쳐간다. 바쁘고 힘든 일상을 보내는 건 간병인으로 일하는 아내 '에비'(데비 허니우드)도 마찬가지다. 고된 노동을 마친 부모는 텔레비전을 켜 둔 채 자녀들보다도 일찍 잠들고, 가족의 일상은 점차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 것이 된다.



<미안해요, 리키>는 사회문제를 고발하거나 화두를 제기하는 영화라기보다 그저 '이런 삶들을 우리가 헤아릴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가만히, 그러나 묵직하게 질문하는 영화다. 영화의 결말은 내 기준에서 꽤 충격적이고 강렬했는데, 그건 상상하지 못한 맺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끝내야만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구나' 하고 뒤늦게 밀려오는 탄복과 탄식 때문이기도 했다. 이게 단지 영화이기만 할까. 누군가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에 관해 말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감에 짓눌린 채 상처투성이 몸을 이끌고 일터로 나선다. 단란했던 예전이 그립다고 말하면서도 가족 구성원들은 어긋나거나 다툰다. 이 사람들의 일상이, 이 삶이 계속 지켜질 수 있을까.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컷

이제 제목에 대해 말할 차례다. 영화의 원제 'Sorry, We Missed You'는 영화에서 '리키'를 비롯한 배송기사들이 부재 등으로 고객에게 물건을 직접 전달하지 못했을 때 남겨두는 메모 용지 상단에 적힌 말이다. 그러니까 '리키'는 하루 14시간씩 주 6일을 근무하고도 고객에게 미안해해야 하고 소형 스캐너와 회사의 부속품처럼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 과연 '리키'는 누군가에게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 사람인가. 국내 개봉용으로 번안된 '미안해요, 리키'는 이 질문을 한 차원 넓힌다. 이 글의 앞에서 말한 숫자와 속도에 가려진 삶들을 우리가 평소에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문은 곧 미안함이라는 단어와 이어진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 짧은 엔딩 크레딧 롤을 바라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마음 역시 미안함과 맞닿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리키'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리키'와 그 가족의 안부를 걱정하게 된다. 좋은 영화는, 영화에 그치지 않고 삶과 연결된 질문을 남긴다. <미안해요, 리키> 역시, 그래서 좋은 영화다. 영화와 세상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켄 로치의 영화처럼 영화가 오직 사람을 존경하고 보듬고자 세상에 치열하게 질문할 때, 그 시선은 낡지 않는다.


(2019년 12월 19일 국내 개봉, 101분, 12세 이상 관람가.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영화 '미안해요, 리키' 국내 메인 포스터

(★ 8/10점.)

(롯데시네마 신도림, 2020.01.01., 2020.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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