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헤인즈 감독 신작 '다크 워터스'(2019) 리뷰
이 글을 클릭한 당신은 ‘테플론’에 대해 한 번쯤은 들어보았는가.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된 한 화학 물질은 누군가의 아이디어에 의해 프라이팬과 같은 생활 용품으로 용도가 확장되었다. 음식이 눌어붙지 않는 ‘마법의 물건’처럼 통한 테플론은 그렇게 수십 년 동안 현대인의 생활에 깊숙하게 스며들었다. 보이지 않는 사이에.
본론을 꺼내기 전에 먼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에린 브로코비치>(2000) 이야기부터 잠깐 해볼까.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에린 브로코비치>는 무일푼으로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 정리 일을 시작한 ‘에린’이 우연한 계기로 에너지 기업 PG&E의 공장에서 화학 물질이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법정 드라마다. 결과적으로 PG&E는 크롬 성분 유출로 피해를 본 600여 명의 힝클리 지역 주민들에게 3억 달러가 넘는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고, 이것은 실화다.
서두에 말한 테플론과 관련된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가 하나 있다. 정확히는 테플론 자체가 아니라 ‘PFOA’라는 화학 물질에 대한 이야기. 영화 <다크 워터스>(2019)의 결말 이후 크레딧 부분에는 이런 자막이 나온다. “PFOA is believed to be in the blood of virtually every living creature on the planet... including 99% of humans.” 십수 년의 여정 끝에 마침내 ‘PFOA’의 악영향이 밝혀진 뒤에도 이 말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는 쓰이지 않지만 사실상 거의 모두에게 이미 노출되어 있는, 이 물질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토드 헤인즈 감독이 연출한 <다크 워터스>는 테플론의 제조사이자 미국 최대의 화학 기업 듀폰 사의 ‘PFOA’를 둘러싼 진실 은폐 의혹을 고발한 변호사 ‘롭 빌럿’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주로 기업 변호를 담당하는 거대 로펌 태프트의 파트너 변호사였던 ‘롭’은 한 축산 농부로부터 듀폰 사가 은밀히 매립지에 화학 물질을 버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한 후 훗날 십수 년 동안 이어지게 되는 끈질기고 집념 어린 추적과 고발을 시작한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전작인 <원더스트럭>(2017)과 <캐롤>(2015)과 성격상 거의 정반대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다크 워터스>는 2016년 1월 <뉴욕 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아티클이 출발점이었다. 8년간 기업 변호사로 일했던 롭 빌럿(Rob Bilott)이 자신의 커리어에 찾아올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환경 문제에 뛰어든 이 이야기에 <스포트라이트>(2015)의 제작사 파티시펀트 미디어(Participant Media)가 관심을 가지면서 영화화가 시작되었다. 배우로서는 물론 환경운동가로도 활발히 활동 중인 마크 러팔로가 주인공 롭 빌럿 역에 캐스팅되면서 본격적으로 과정이 진전되었다. 토드 헤인즈 감독 역시 “마땅히 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연출직에 합류했다.
마크 러팔로는 <다크 워터스>에 주연은 물론 제작자로도 참여하는 열의를 보이며 자신이 연기할 캐릭터의 모델인 롭 빌럿 본인과도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는 또 한 편의 그렇고 그런 고발성 실화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느 정도는 맞다. 앞에서 굳이 <에린 브로코비치> 이야기를 한 것과 <다크 워터스> 제작자의 전작 중에 <스포트라이트>가 있다는 점을 언급한 것도 그래서다.
기업 집단은 전문으로 변호하는 로펌에서 파트너로 승진해 잘 나가던 8년 차 변호사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낯선 농부로부터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의 이야기를 처음에는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할머니와 이웃 주민이었다는 것 때문에 그가 한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고, 자기 커리어에 아무 도움도 안 될 수도 있음에도 무작정 농부의 변호를 맡기로 한다. 피고인 듀폰 사는 당연히 진실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성의 없는 태도로 사건은 장기화된다. (...) (이후는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크 워터스>는 익숙하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에만 그치지 않는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이 '나만의 일이 아님'을 뒤늦게 깨닫고 문제에 뛰어드는 이야기로 짜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술한 대로 <다크 워터스>의 주인공은 그 정도가 아니라 차라리 듀폰 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울 대형 로펌 변호사다. <다크 워터스>의 성실하고도 섬세한 연출과 각본이 중점을 두고 있는 건 물론 십수 년을 끌어온 사건 자체도 있지만 이 일에 뛰어든 '롭 빌럿'이 과연 무엇을 위해 여기 매진하게 되었는지, 그러고 나서 그는 물론 아내 '사라'(앤 해서웨이)를 비롯한 가족과 주변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왔는지에 있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뻔했던 충격적인 진실을 고발하는 이야기와 그 최전선에 뛰어든 한 인물의 내면 묘사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차분하고도 진실되게 만나 탄생한 <다크 워터스>는 A급 감독과 배우가 만나 힘 빼고 이야기 본연에 집중한, 단단한 드라마다. 여기에 '롭 빌럿' 본인은 물론 이 사건의 주요 의뢰인이거나 당사자였던, 윌버 테넌트의 동생 짐 테넌트, 버키 베일리 등이 직접 카메오 출연을 하며 이야기에 힘을 보탠다. 여러 매체의 기사와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단지 우정 출연 정도가 아니라 영화의 제작에도 긴밀하게 협업하고 조력했음을 알 수 있다. (크레딧 말미에는 'Special Thanks To'로 이들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기도 한다.)
코로나19 여파로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은 극장에 활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건 물론 코로나19가 잠잠해지는 일도 있겠지만 관객들의 관심과 발길을 이끌 새 영화의 개봉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사냥의 시간>과 같은 신작들이 줄줄이 개봉을 연기했고,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4월에서 아예 11월로 날짜를 옮겼다. 지금껏 소개한 <다크 워터스> 역시 2월 말 개봉 예정이었으나 3월 11일로 일자가 조정되었다. 무엇보다도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그의 신작을 개봉 전 먼저 만나게 되어 기쁜 마음이다. 그것이 이토록, '꼭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에 더욱 그렇다.
*듀폰 사는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3,535건(명)에 대해 총 6억 7천만 달러가 넘는 배상금을 지불했다. 이 사건 이후 이른바 '포에버 케미컬'로 불리는, 제대로 된 법적 규제를 받지 않고 있는 600여 종의 화학 물질들을 제대로 조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다크 워터스>(Dark Waters, 2019), 토드 헤인즈 감독
2020년 3월 11일 (국내) 개봉, 127분, 12세 이상 관람가.
출연: 마크 러팔로, 앤 해서웨이, 팀 로빈스, 빌 캠프, 빅터 가버, 빌 풀만 등.
수입: CJ엔터테인먼트
배급: (주)이수C&E
*(★ 8/10점.)
*<다크 워터스> 국내 메인 예고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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