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차, 산과 연애하는 여자

브라보 맨발산행

by 미친 선녀

월드컵 4강 신화로 붉게 물들던 2002년 여름의 기억을,

추억 압축 파일에서 하나씩 풀어내려 한다.


상체에 비해 유난히 발달한 엉덩이와 허벅지의 주인이었던 20대 시절,

하체의 비밀스런 정체가 드러나는 청바지 대신,

허리와 엉덩이 곡선을 살리면서 허벅지를 감추기에 유리한 치마를 입으며,

다이어트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다. 1년 내내 치마를 입으면서도

내 딴에는 멋을 아는 여자라며 이리저리 쏘다녔다.


"어떻게 결혼 할거니? 살 좀 빼라, 살 좀 빼."

부모님의 잔소리로 한의원 침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한의사 선생님은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당부하신다. 부모님은 새벽마다 아파트 뒷산을 다니셨고, 특별히 하던 운동이 없던 나도 합류했다. 그때부터 생활 습관이 바뀌었다. 밤 12시 넘어 자던 내가 9시쯤에는 잠들어 새벽 5시 전후에 일어났다. 부모님을 따라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 꾸역꾸역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식탐과는 오랜 지기 친구였는데, 세 숟가락 정도의 밥을 접시에 평평하게 깔아 양을 줄이고 양배추와 고등어를 주로 먹으면서 절교했다. 밥을 먹을 때는 숟가락 대신 젓가락을 사용하고 의식적으로 스무 번은 씹으려고 노력했다. 삶은 양배추는 달큰했고 구운 고등어와 잘 어울렸다. 한약과 식욕억제제를 잘 복용하고 다이어트 전기 지방 분해침도 제일 강하게 최선을 다해 맞았다. 그 결과 한 달 만에 몸무게는 10킬로 이상 빠졌다.

부모님은 내가 살이 빠져 바지를 입은 모습을 보고 대견해 하시며 활짝 웃으셨다. 그런데 그동안 억눌려 있던 식탐이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다. 부모님 몰래 먹는 습관이 생겼다. 혼자 있는 시간에 폭식을 자주 하였고 죄책감으로 산을 더 열심히 다녔다.

어느 날, 엄마는 어느 정도 살이 빠졌으니 결혼하라고 눈물로 하소연 하셨다. 엄마 말에 어떤 면에서는 순종적이던 나는, 2003년 11월 우여곡절 끝에 동갑내기 친구와 결혼했다. 결혼의 우선 조건은, 산과 가까운 곳에 신혼 집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었고 신랑은 고맙게도 그런 집을 구해 주었다.


결혼하기 전 신랑은 친정 부모님께 같이 산에 다니겠다고 약속했지만, 결혼 후 돌변했다. 산에서 군대 생활을 했기에 산이 지겹고 싫다고. 결혼하고 혼자 산에 다니는 것이 불만이었는데,

‘그래, 난 산과 결혼한 여자야.’ 라는 포장이 왠지 그럴싸했다.


2011년 유난히 눈이 많이 왔던 겨울의 새벽산이 떠오른다. 1월부터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계약직 인턴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출근 8시 30분, 퇴근 4시 30분. 산에 갈 수 있는 가장 여유롭고 적당한 시간은 새벽 5시 즈음이다.

‘어떻게 내가 그 시간대에 산에 갈 수 있을까?’

1년 내내 산을 다니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따라 산에 가는 시간은 달랐다. 6월에는 5시에도 환하지만, 7월이 지나면서 점점 새벽이 어두워진다. 그래서 겨울에는 보통 7시 전후로 산에 다녔는데, 과연 이 시간대에 산에 갈 수 있을지는 도전이 답이다. 학교에서 일한다고 말하기 전, 미리 도전해 본다. 겨울, 새벽 산에 갈 수 있는 상황이면, 학교에 출근한다고 말하리라.


산 입구 나무 계단으로 성큼 성큼 올라간다. 가로등이 있어 온통 흑백의 나무들이 더 진한 색을 입은 듯 선명하다. 사람이 주로 다니는 산길에는 가로등이 있지만 좀 더 깊은 산속에는 가로등이 없다. 사람이 곡하는 듯한 고라니의 소리도 유난히 크게 들린다. 어디선가 반짝이며 사라지는 빛이 보인다. 고요하고 어두운 산길이 무서워 mp3에 신랑이 담아 준 재즈곡들을 들으면서 다녔다. 고양이의 야광 눈빛을 몇 번 보았고 흠칫했다.

‘무서워, 집에 다시 갈까? 이 어둠을 뚫고 산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상한 소리도 들려. 뭘까?’

다행인 것은 그렇게 어두운 시간대에도 눈이 쌓인 날은 산길이 보인다는 것이다. 달빛이 밝은 날, 보름달이 뜬 날은 그 빛으로 산길을 걸을 수 있었고, 눈이 쌓이면 새벽의 검은 산길이 하얗게 보였다. 게다가 눈이 쌓인 날은 아이젠을 착용하고 등산을 하기 때문에 좀 더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전력질주를 통한 무아지경 이라고 해야 할까? 속력을 내면 무서움도 사라진다는 장점이 있었다. 흑백으로 가득한 고요한 산에, 눈부신 달님과 따뜻한 멜로디의 재즈가 칠흑 같은 검은 산을 편안하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새벽산 도전에 성공해서 학교에 출근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날까지 산에 갔다. 임신 6개월이 넘어가면서 배도 많이 나오고 경사가 가파른 산길은 헉헉대기 시작한다.

‘산은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평지길 위주의 산길을 선택해서 다녔다. 아기를 출산하니 이건 딴 세상이다! 밤과 낮이 바뀌고 창밖으로 보이는 산을 쳐다볼 여유도 없다. 그런데 출산 후 100일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규칙적인 수면 패턴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슬슬 산이 나를 부르는 것 같다.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나 산에 가고 싶은데······"

"새벽에 아기 잘 때 잠깐 다녀와."

"어떡해 산에 가? 아기 깨면 어떡하게. 잉잉."

"엄마는 다 그렇게 키웠어."

‘엄마 때랑 지금이랑 같아?’

말하고 싶었지만,

"알았어."

친정 엄마와 통화 후 내가 한 결정은,

‘딱 한시간이야. 한 시간만 나에게 투자하자!’

다행히 신랑이 출근하는 시간보다 내가 더 빨리 산에 출근하면 아기가 혼자 있는 시간은 한 시간 이내로 줄어들어 최대한 새벽 시간을 활용해 보기로 했다.

2012년 3월 21일. 출산 후 약 117일이 지나고 산을 만나러 가기로 결정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니?"

이런 말을 산과 했었을까? 아마 그때는 아기 깰까 봐 부랴부랴, 정신없이, 미친 듯이 산길만 걸었을 것이다. 아기가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살금살금 집에서 나와 부랴부랴 산속으로 날아간다.


그런데 아기가 돌 때쯤, 걷기 시작하면서 내가 산에서 돌아오면 아기는, 현관문 앞에 서서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허리와 무릎이 아파 아기처럼 네 발로 기어다니기 시작한다. 다시, 산과 이별했다.

그때는 병원과 살짝 바람을 피운걸까? 병원과 몇 개월 정도 바람을 피우다가 다시 걸을 수 있게 되면 산의 품으로 간다. 그는 언제나 나를 받아준다는 것이 장점이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새벽 산에서 아침 산으로 시간대를 바꾸었다. 이른 새벽에 다니다가 환한 아침에 집에서 나간다는 것이 한 달 정도는 낯설었다. 그런데 아침 산을 다니게 되면서 나무들의 색이 보이기 시작한다. 새벽과 달리 아침에는 등산하는 사람도 많다. 겨울에는 새벽보다 아침에 가면 더 따뜻하다는 장점도 있다. 시간대에 따라 꽃향기의 농도가 다르다.

그날의 상황에 따라 아침에도 가고 점심에도 가고, 오후에도 가고. 햇살에 빛나는 나뭇잎의 다양한 색을 볼 수 있었다. 이게 어떤 나무일까? 저 새는 뭘까? 이 향기로운 냄새는 어디서 오는 걸까? 산의 풍경을 즐기게 되었다. 그렇게 산과 지금까지 25년차 연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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