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궁극의 즉흥연주

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16

by 손안의 우주


나는 사실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빠가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면 눈이 저절로 하트가 되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만큼 애정이 솟지 않는다. 그래서 아내는 종종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강아지 보듯 우리 애들도 좀 봐주면 안 돼?”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늘 자식이 갖고 싶었다. 내 DNA가 복붙된, 나랑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가 내 앞에서 움직이고, 말을 걸고, 자라날 때 어떤 감정을 느낄까—그게 항상 궁금했다. 결국 나는 그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자식을 창작(?)했다. 영감이 떠오르면 뭔가를 만들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예술가적 본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인도의 전통음악과 타블라 연주는 본질적으로 ‘즉흥’을 중심에 두고 있다. 연주자는 일정한 틀 안에서 순간순간 반응하며 새로운 소리를 즉석에서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흐름과 사건들이 발생하고 그것이 다시 연주자에게 영감을 준다. 이 상호작용은 자식을 키우는 경험과 닮아 있다. 부모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 따라 아이는 끊임없이 달라지고 그 변화는 다시 부모의 내면을 흔든다.

아이와 함께 지내며 느끼는 좌절과 경이는 내가 타블라를 연주할 때 마주치는 감정과 다르지 않다. 손가락 끝의 작은 움직임 하나가 음악 전체의 방향을 바꾸고 그 변화가 다시 나를 흔들듯이 아이와의 관계도 한순간의 눈빛, 한 마디 말, 한 번의 손짓으로 완전히 다른 흐름을 만들어낸다. 육아란 얼마나 정교하고 민감한 그루브의 리듬인가.


앙리 르페브르는 『리듬분석』에서 인간의 삶을 두 가지 리듬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나는 심장 박동과 호흡,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과 육체가 빚어내는 유기적 리듬, 다른 하나는 시계, 공장, 도시 시스템처럼 사회가 강제하는 기계적 리듬이다. 우리의 일상은 이 두 리듬이 충돌하거나 공명하는 장에서 형성된다.


육아는 그 앙상블의 대표적인 예다. 아이의 울음과 웃음, 몸짓과 행위들은 그 자체로 리듬이고 나의 일과 사회적 일정 또한 리듬이다. 때로는 서로의 박자가 어긋나 좌절을 만들고 또 때로는 놀라운 합으로 경이를 만들어낸다. 육아는 그 반복 속에서 나를 흔들고 다시 나를 길러낸다.


앙리 르페브르가 말했듯 삶은 본래 수많은 리듬이 교차하며 만들어지는 장이다. 삶 자체가 음악인 것이다. 아이와 함께하는 매일은 그 사실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인다. 나는 매일 그 변주를 따라 배우고 연주하며 살아간다.


이 감각은 인도 고전음악의 전통 안에서도 깊게 흐르고 있다. 많은 명인들이 음악을 단지 직업이 아니라 가문의 길로 받아들였다. 타블라의 거장 알라 라카는 아들 자키르 후세인을 무대 곁에서 자라게 했고 자키르는 아버지의 숨소리를 들으며 박을 배웠다. 그런데 그 음악적 전수는 단지 훈련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키르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태어나 집으로 돌아온 지 이틀째 되던 날, 아버지는 아기의 귀에 전통적인 기도문을 속삭이는 대신 타블라 리듬을 읊조렸다고 한다. (그 아기는 타블라의 신이 되었다.) 어머니는 불경스러운 행위로 여겨 분노하며 항의했지만, 알라 라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이것이 나의 기도다. 나는 음악을 숭배하는 자이며, 이것이 내가 받은 지식이다.”


이토록 자연스럽고 깊은 음악의 전승—삶과 예술, 사랑과 수련이 구분되지 않는 방식. 악기는 단지 기술이 아니라 가족의 공기를 타고 흐르는 유산이었다.


이런 가족 중심의 전통 안에서는 연습도 교육도, 일상도 공연도 하나의 연속선 위에 있다. 아버지의 숨소리, 스승의 손놀림, 형제의 리듬이 자식의 감각 안에 서서히 녹아드는 방식. 그것은 계획되거나 강요된 전달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교감하는 ‘살아 있는 전수’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연주와 다르지 않다는 나의 감각은 이 오랜 전통 속에서 이미 수많은 연주자들이 체험해온 것이리라.


나는 자식이라는 존재로부터 좋은 음악과 조화로운 연주를 배운다. 그리고 좋은 음악과 조화로운 연주로부터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를 배운다. 아이를 키우며 마주치는 삶의 모든 예측 불가능함이, 결국 연주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와 함께 만들어가는 삶은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을, 매순간이 단 한 번뿐인 즉흥연주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나는 주변의 예술가나 창작자들에게 말한다. 젊은 시절의 자유를 조금 내어주더라도, 아이를 맞이해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우리가 평생 찾아 헤매는 궁극의 작품, 유일무이한 연주를 자식을 통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정명철



작가의 이전글관상은 과학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