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15
나는 수년간 고민했다. 대가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 실마리를 잡았다. 빠른 손, 정확한 박자와 같은 기술의 유무가 아니었다. 차이는 오직 하나, 관찰자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있었다. 대가는 뇌에서 벌어지는 감각의 바다를 유유히 유영하며 그것을 관찰한다. 물고기도 보고 해조류도 만져보며 그 세계를 느긋하게 탐험한다. 그런데 나는 그 흐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기 바빴다.
대가들의 연주를 보면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것 같다. 머리와 손을 분리해도 손이 저절로 움직일 것만 같은 경지. 그 숙련도와 자유로움 앞에 경외감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들의 손놀림에 매료되어 기술 자체에 집착하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몇 년 동안 어떤 손의 움직임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매달렸다. 매일 몇 시간씩 반복해도 진전은 없었고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자키르 후세인의 연주 영상을 반복 재생하며 그의 손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계시 같은 순간이었다. 한 시간을 쉬지 않고 연주하는데 그의 표정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과 같았다. 차분하면서도 끊기지 않는 몰입, 흥미진진한 줄거리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은은한 미소.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아니면, 표정이 저 경지를 만든 걸까?”
"여유가 표정을 만드는 게 아니라, 표정이 여유를 만드는 게 아닐까?"
나는 내 연주 영상을 되돌려 보았다. 내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고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절박하고 답답해 보였다. 호흡도 불규칙했다. 눈 코 입에 내 시끄러운 내면 세계가 다 담겨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정확한 박자, 빠른 손, 여유, 카리스마, 이 모든 것들은 다 부산물이었다는 것을. 진짜 주산물은 ‘관찰’이었다. 관찰자가 될 때, 내면은 고요해지고 얼굴로 드러난다. 그때 기술은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었다. 기술 자체에 집중하면 감각의 바다에서 끊임없이 허우적대게 된다. 마치 수영 영법을 많이 익혔다고 해서 바다에서의 여유까지 보장되지 않듯 말이다. 중요한 것은 물살에 몸을 맡기고 흐름을 따르는 것, 그때 비로소 기술은 살아나고 자유로운 유영이 가능해진다.
나는 부산물에서 주산물로 연습의 항로를 수정했다. 기술자에서 관찰자로 내 정체성을 재설정했다. 가장 마음이 시끄러워지는 난이도가 있는 기술을 연습할 때 난 광활한 바다를 상상하며 그걸 보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았다. 들숨과 날숨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에 고요가 먼저 오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연극처럼 수행되었다. 나는 배우가 되어 대가의 표정과 호흡을 내 얼굴에 가져왔다. 이 사소한 변화만으로도 감각의 우주, 뉴런의 지도가 다시 그려졌고 풀리지 않던 기술이 서서히 풀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관찰자는 태양, 기술들은 그 둘레를 도는 행성들과 같다. 예전에는 개별 기술이라는 행성 하나하나를 따로 움직이려 애쓰느라 연주 전체가 삐걱거렸다. 하지만 관찰자라는 태양을 중심에 놓자 모든 것이 정렬되기 시작했다. 손의 움직임, 소리의 밀도, 박자의 유연함, 표정과 호흡까지도 차츰 자기 궤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손이 갑자기 빨라진다든지 눈에 띄게 화려해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주는 전보다 훨씬 편안한 타이밍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또한 내가 평온한 마음으로 연주하니 관객들도 미묘하게 다르게 반응했다. 어쩌면 감각의 조율은 기술보다 먼저 청중의 마음에 닿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태양이다. 그것이 있어야 질서가 생긴다. 기술의 습득과 관객의 반응은 중심이 아니라 부산물이고, 진짜 중심은 늘 '지켜보는 나', 관찰자의 자리에 있었다.
과거의 나는 지독하게 완벽을 추구했다. 기술을 완벽히 수행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늘 불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 시선을 타인에게도 투사하여 남들도 나를 그렇게 보리라고 단정 지었다. 두려움이 마음을 물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타인의 시선에도 이전보다 훨씬 관대해졌고 나 자신을 몰아세우던 완벽주의도 천천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기술이 완성되어야 마음이 평온해질 거라 믿었지만 이제는 평온한 마음이 기술을 완성시킨다는 사실을 안다. 연주는 결국 감정의 상태를 반영한다. 몸의 긴장은 마음의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의 표정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말해준다.
요즘 한국 사회에 명상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명상 앱, 명상 클래스, 명상 콘텐츠가 넘쳐난다. 그만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명상은 어떤 종교적 기법이 아니다. 명상은 감정과 감각, 그리고 자기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나는 그것을 얼굴에서 찾는다. 연주할 때의 표정, 미세한 근육의 흐름 속에 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다. 나의 표정이 변했다는 건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 변했다는 뜻이다. 얼굴은 명상의 입구이자 출구이다. 명상이란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표정으로 시작되고 나의 연주를 통해 드러나는 삶의 방식이다. 우리 모두 미소를 짓고 감각의 수평선을 바라보자.
글/정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