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14
악기는 언어다. 단어와 문장, 문법이 있고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도구라는 점에서 그 본질이 같다. 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떠올려 보면 좋은 악기 연습법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효과적인 외국어 학습의 사례를 통해서도 같은 통찰에 다다른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울 때는 어떤 목적의식도, 성취에 대한 강박도 없다. 놀듯이 흘러가며 몸에 스며드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깊이 각인된다.
인도의 음악가들이 지켜온 구전 전수 전통은 음악을 언어로 바라보는 지혜의 표현이었다. 스승이 입으로 읊조린 구음(口音)을 제자는 귀로 받아 적듯이 새기고 그것을 다시 손끝으로 옮겨 연주했다.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귀와 몸으로만 이어지는 이 방식은 음악을 일종의 살아 있는 언어로 간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언어가 대화 속에서 생명력을 얻듯, 음악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속에서만 살아 움직인다는 확신이 그 전통의 밑바탕이었다.
과거의 나는 악기와 언어의 유사성을 깨닫지 못한 채, 대한민국의 주입식 교육이 만들어 놓은 패턴대로 악기를 연습했다. 잘못된 습관은 단순히 시간을 허비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감각의 지도 위에 왜곡된 흔적을 남겼고 그 잘못된 선은 이후의 길 전체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내가 겪은 시행착오는 분명히 기록해 둘 만하다. 나를 오래 붙잡아 온 몇 가지 습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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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내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피아노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한 달 넘게 피아노 학원을 무단으로 빠지다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사시던 원장님과 어머니의 만남으로 들통이 났다. 그날 부모님께 먼지 나게 얻어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피아노를 그만둘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음악을 업으로 삼게 될 줄 알았다면 분명 열심히 했을 것이다. 잼민이 시절에는 엄마 말 들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피아노가 나에게 비호감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횟수 채우기’식 연습이었다. 선생님은 칸이 나뉜 수첩을 주고 숙제곡을 친 횟수만큼 칸을 동그라미로 채우게 했다. 열 개를 채워야 집에 갈 수 있었는데 나는 세 번 정도 치고 나머지는 무의미하게 동그라미만 채웠다. 그 세 번마저도 선생님이 창문으로 감시할 때만 연주하는 척 흉내를 냈다. 내가 동그라미 그리기 연습을 하는 건지, 피아노 연습을 하는 건지 햇갈렸다. 연습을 의미 있는 탐구로 경험하지 못하고 벌칙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의무감과 요령으로만 버티려 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언어를 배울 때 목표 횟수를 정해놓지 않는다. 외국어 회화도 마찬가지다. 하루에 단어 100개를 외운다고 해서 대화가 술술 풀리지 않는다. 횟수만 채우는 연습은 감각의 지도 위에 공허한 동그라미만 남길 뿐, 그 동그라미가 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음악은 횟수가 아니라 맥락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버티는 연습은 더 깊은 함정이었다. 연습 시간에 대한 강박과 다짐은 결국 의자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몸은 악기 앞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딴 데 가 있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아무 성과도 남기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그 다짐은 실제로 음악을 깊이 탐구하려는 결심이라기보다 게으르면 안된다는 강박을 달래려는 자기 위안에 가까웠다.
아이들은 언어를 배우면서 몇 시간을 반드시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짧은 순간에도 강렬한 호기심과 몰입으로 단어를 흡수한다. 영어책 앞에 두 시간을 앉아 있어도 기억에 남는 것은 몇 문장뿐이지만 더듬거리더라도 원어민과 재밌게 대화한 '순간'은 오래도록 몸에 새겨진다. 감각의 지도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순간의 밀도로 새겨진다. 연습은 억지로 채운 시간이 아니라 '시간이 사라지는 몰입'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실제로 뇌는 강박적으로 반복할 때보다 즐거움과 호기심 속에서 도파민이 분비될 때 훨씬 더 강하게 회로를 강화한다. 몰입은 단순한 심리적 경험이 아니라, 학습을 가속화하는 신경학적 조건이다.
그래서 나는 연습을 따로 시간을 내어야 하는 의무로 여기지 않으려 했다. 부부의 대화처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순간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부엌과 서재, 거실에 각각 타블라를 하나씩 놓아두었다. 연습실이라는 별도의 공간에 악기를 두지 않고 일상에 위치시킴으로써 연습에 대한 시공간적 강박과 분리의식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국을 데피는 동안에도, 영상을 렌더링하는 동안에도,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손은 자연스레 움직였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연습할 조건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연습 시간 길이에 대한 부담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마음에 힘이 빠진 것이다.
생활의 자투리 시간이 모여 작은 선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쌓여 결국 큰 길이 된다. 중요한 것은 오래 붙잡는 것이 아니라 적은 시간이라도 자주 만나는 것이다. 작은 만남이 반복될 때 지도에는 짧지만 선명한 길이 생기고 그 길들이 이어져 전체 지형을 만든다. 긴 시간 억지로 버티는 것보다 짧지만 반복되는 접촉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마치 인간관계도 몇 시간을 붙들고 있어야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짧더라도 자주 만나고 연락할 때 관계가 깊어지는 것처럼.
연습은 30분이면 충분하다. 다만 그 30분이 매일 삶의 순간순간에 스며들어야 한다. 그 때 지도는 끊기지 않는 길을 만든다.
또 하나는 악보에 의존하면서 연습하는 것이다. 외국인과 대화할 때 우리는 손에 스크립트를 들고 있지 않다. 눈을 맞추고, 맥락을 듣고, 즉흥적으로 반응한다. 악보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연주자는 음악의 언어적 흐름을 놓친다. 살아 있는 대화가 아니라 문자 읽기로 변해버린다. 뇌는 기억력, 청각, 맥락 인식 같은 공감각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채 눈앞의 기호를 해독하는 데 에너지를 빼앗긴다. 악보는 안전망처럼 보이지만 결국 감각의 회로를 단순화시키고 연주를 취약하게 만든다.
인도의 음악가들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원리를 알고 있었다. 그들의 전통은 기록이 아니라 구전에 있었다. 스승의 입에서 제자의 귀로, 귀에서 손끝으로 이어지는 길. 말(구음)로 외우고 몸으로 각인하는 과정은 기억과 청각, 맥락 인식을 동시에 단련하는 수련이었다. 그것은 기록이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음악을 몸 전체에 새기려는 지혜였다.
악보는 분명 의미가 있다. 처음 배우는 이들에게 악보는 지도가 되어 길을 알려주고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안전망이 되어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출발점일 뿐이다. 지도를 손에 쥔 채로만 걷는다면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악보에만 의존하면 소리와 감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 버린다. 악보가 제시하는 구조와 질서를 익힌 뒤에는 점차 그것을 손에서 내려놓고 귀로 듣고 몸으로 반응하며 흐름 속에 들어가야 한다.
악보는 연습 초기 단계에서 길을 안내해 주는 최소한의 정보 정도에 머물러야 한다. 일정한 구간을 반복하고 손과 귀가 익어감에 따라 곧 암기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음악은 문자 읽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가 된다. 악기를 이제 막 배우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악보를 가능한 한 빨리 손에서 떼어내는 것이다. 암기와 즉흥 속에서 비로소 '듣기’와 ‘반응하기’라는 진짜 음악의 능력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연습은 누군가와 함께할 때 효율이 올라간다. 재미가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물론 홀로 깊이 몰입하는 순간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시간이 전부가 되어버리면 음악은 언어로서의 본질을 잃는다.
아이들은 언어를 혼자 중얼거리며 배우지 않는다. 부모와 눈을 맞추고, 친구와 부대끼며, 맥락 속에서 단어를 익힌다. 외국어도 혼자 문법책만 붙잡고 있으면 머릿속에서는 모든 문장이 맞아떨어지는데 정작 원어민 앞에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언어도 음악도 대화 속에서 길러지고 그 주고받음이 감각의 지도를 넓힌다. 합주에서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맞추는 과정, 스승과 동문들과의 문답 속에서 주고받는 리듬, 청중 앞에서 느끼는 긴장과 해방,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지도를 넓히는 길이 된다.
타블라 수행자들은 이런 방식을 전통으로 이어왔다. 그들의 수련은 늘 구루와 제자가 마주 앉아 주고받는 문답 속에서 이루어진다. 스승의 소리를 듣고 곧장 따라치며 그 자리에서 끊임없이 질문과 응답이 오가는 훈련. 수업이 끝난 뒤에는 동문들과의 합주가 이어지고, 청중 앞에서의 경험까지도 수련의 일부였다. 합주와 문답, 청중과의 만남 속에서 길러진 감각이 곧 음악의 지도였다.
나도 남 앞에서 틀리고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 고립된 연습만 반복하던 시기가 있었다.그러나 정작 무대에 서면 손은 굳고 귀는 닫혔다. 독학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술 습득이 더딘 것, 스승의 교정을 받지 못해 오해에 빠지기 쉬운 것도 문제지만 더 큰 위험은 대화의 감각을 잃는 것이다. 음악은 혼자만의 완성도가 아니라 함께할 때 비로소 살아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습할 때 실수 없이 완주하는 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감각의 지도는 실수 없이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틀리는 순간, 길이 끊기고 다시 이어지면서 더 선명한 선이 남는다.
아이들은 언어를 배우며 수없이 틀린다. 성인들이 외국어를 더디 배우는 가장 큰 이유는 틀리지 않으려다 결국 입을 닫아버리는 데 있다. 그러나 틀리면서 말할 때 비로소 언어가 몸에 배듯, 음악도 틀리면서 소리가 자기 것이 된다. 실수 없는 연습은 지도를 공허하게 만들지만 틀림을 허용하는 연습은 지도를 풍성하게 한다.
어떤 기법은 잘 되는 날도 있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날도 있다. 그런데도 오늘은 반드시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집착으로 몇 시간을 붙잡으면 연습은 탐구가 아니라 강박으로 변한다. 사람들은 흔히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심리적 위안으로 이런 집착을 정당화하지만 그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강박을 버리는 일이다.
감각의 지도는 억지로 그린다고 선명해지지 않는다. 감각은 직선적으로 쌓이는 것이 아니라 파동처럼 겹치고 중첩된다. 오늘의 경험은 당장은 성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다른 날의 감각과 겹쳐지며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길을 열어 준다. 그러므로 안 되는 날은 차라리 손을 놓는 것이 낫다. 산책을 하거나 친구와 대화하는 시간이 더 좋은 지도가 되기도 한다. 억지로 밀어붙이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 부정적인 감각이 지도에 얼룩처럼 남는다.
연습은 억지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순환을 허용하는 일이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 스트레스와 강박 속에서는 마음이 단단히 수축되어 유연함을 잃는다. 그러나 집착을 내려놓고 허용하며 흘려보낼 때 마음은 편안히 이완된다. 비교는 마음 근육을 가장 심하게 수축시키는 습관이다. 많은 이들이 “나보다 나은 사람을 옆에 두는 것만큼 최고의 동기부여는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더 큰 위축을 남긴다.
대한민국의 입시 음악 체제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학생들은 함께 울리고 틀리며 배우는 대신, 옆 사람보다 한 음 더 정확하고 한 박 더 빠르기를 강요받는다. 음악은 언어가 아니라 점수로 환원되고 비교는 성장의 조건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으로 굳어졌다. 친구는 더 이상 동반자가 아니라 경쟁에서 이겨야 할 적이 되었고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음악을 사랑하기보다 음악에 지쳐버린다.
인도의 타블라 수행자들은 구루와 동문들은 서로를 경쟁자로 보지 않고 함께 울리고 함께 틀리며 배우는 동반자로 여겼다. 비교 대신 공명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었다. 그 속에서 배움은 점수가 아니라 경험의 축적, 지도 위의 길로 남았다.
비교는 뇌에 상처를 남긴다. 자신을 끊임없이 타인과 견주면 뇌는 성취의 기쁨보다 위협을 먼저 감지한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고 긴장은 손끝을 굳게 만든다. 무대 위에서 가장 큰 적은 남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은 귀를 닫고 몸을 경직시켜 감각의 지도에 선명한 길 대신 얼룩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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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달렸던 모든 습관들은 같은 뿌리에서 자라났다. 그 모든 행위는 결국 잘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되었다.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없으니 나는 애써 불안을 덮으려는 방식으로만 연습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알게 되었다. 음악은 불안 속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길은 억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순간과 순간이 쌓이며 저절로 드러난다. 실수는 지도 위에 얼룩이 아니라 새로운 길의 흔적이 된다. 짧은 만남이 반복될 때 길은 이어지고 함께 울리는 순간 공명은 더 큰 울림을 낳는다.
이제는 불안 대신 신뢰에 기대고 싶다. 다 잘될 것이라는 앎, 그것이 마음을 풀어주고 손끝을 열어준다. 음악은 완벽을 향한 집착이 아니라 현재의 울림에 머무는 태도 속에서 살아난다. 그리고 그 믿음이, 결국 우리 각자의 지도를 그려준다.
글/정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