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의 독서기록
여름이 저물어 갈 때쯤이면 꼭 듣는 음악이 있습니다. 듀스의 <여름 안에서>, 뜨거웠지만 행복했던 여름이라는 계절의 추억처럼 뉴 잭 스윙 풍의 경쾌한 멜로디에 서정적인 가사가 절묘하게 어울리는 곡입니다. 오래된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수가 리메이크해 지금까지도 여름이면 어디에선가 들려옵니다. 책을 읽을 때도 이 음악이 나오면 책장을 잠시 덮고 집중해서 음악을 듣게 됩니다. 읽었던 책은 하루만 지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즐겨 들었던 음악은 오랫동안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결정적인 추억과 함께 기억하기 때문입니다(반복의 힘이라고 하기엔 우리의 추억이 너무 소중하니까).
아무튼 이번 8월은 여름의 끝자락이자 가을의 시작이었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낮은 힘들었지만, 소록소록 귀뚜라미 소리 같은 선선한 저녁은 독서와 잘 어울렸습니다. 덕분에 예상보다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여름 안에서 가을 속으로 향하는 계절은 그리움과 반가움의 어색한 동행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어제와 다른 내일이 있기에 흐르는 세월은 설렘이기도 합니다. 이제 추석 연휴가 코앞입니다. 2022년 시작과 함께 의욕 넘치게 계획했던 일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되돌아볼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푸른 바다의 추억은 고이 간직하고 결실의 황금빛 9월이 되길 기원합니다.
『안나 카레니나 3』·레프 톨스토이(민음사, 2009)
#삶과죽음 #레빈 #안나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이야기다. 인간의 삶을 비롯해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따르는 제1 원리는 무엇인가? 레프 톨스토이는 19세기 러시아를 살았던 안나와 레빈,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인생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저자의 삶이 투영된 인물로 레빈을 많이 언급한다. 하지만 레빈이 곧 톨스토이의 전부를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나의 집착과 욕망, 브론스키의 허영과 낭만, 스티바의 세속적 삶 그리고 알렉세이의 우유부단함 등 톨스토이의 여러 단면이 각각의 등장인물에 조금씩 투영됐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러한 인간 군상들의 생각과 결정이 모여 『안나 카레니나』라는 대작을 완성했다.
『안나 카레니나』의 문체도 빼놓을 수 없는 이 책의 매력이다. 일정한 톤은 유지하되, 주요 등장인물들의 성격, 가치관, 심리상태에 따라 변주되는 문체는 이 작품을 다채롭고 풍성하게 만든다. 안나뿐만이 아니라 요동치는 레빈의 질투, 용서와 복수에서 갈등하는 알렉세이 등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들과 동화되어, 19세기 러시아 사교계를 직접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이 작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단연 안나가 기차 플랫폼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장면이다. 무엇보다 ‘왜 그녀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을까?’라는 질문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그랬을까? 톨스토이는 안나가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집요하게 그녀의 심리상태를 묘사한다. 이러한 집요함은 그녀의 우울한 선택에 대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안나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독자들 각자가 해석하기 나름이다. 소설 속 서사의 철칙인 ‘구차하게 설명하지 말고, 직접 보여줘라.’라는 격언의 가장 적절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톨스토이가 작가들의 작가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달과 6펜스』·서머싯 몸(민음사, 2000)
#달 #6펜스 #예술 #세속
『달과 6펜스』는 ‘영국의 증권 브로커라는 세속적인 삶에서 색과 실루엣으로 감동을 전하는 화가라는 순수의 삶으로의 전환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책이다. 그 안에는 현실에 대한 냉소와 예술을 향한 광적인 집착이 동시에 일어나는 전환이었다. 이 책을 다 읽고 가장 먼저 생각나는 질문이 있었다. 왜 제목이 ‘달과 6펜스'일까? 이 작품에서 달과 6펜스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단어일까? 몹시 궁금했다. 단순히 예술과 세속의 대비를 강조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칸트의 정언명령도 가볍게 조롱하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태도는 이 작품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 달: 예술을 향한 열정
• 6펜스: 세속적인 삶, 현실 그 자체
이 작품의 전체 줄거리는 ‘달에 매료되어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이야기’이다. 달도 6펜스도 모두 비슷한 회색이라는 점에서 이 두 세계는 따로 떼어놓게 인간의 삶을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6펜스는 지금 당장 손으로 만질 수 있지만, 달은 바라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달과 6펜스는 같은데 다르며, 다르지만 같은 세계이다. 이런 애매한 구분은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트릭랜드를 바라보는 우리(작중 ‘나'를 포함하여)를 헷갈리게 만든다. 작중의 내레이터로 등장하는 ‘나'는 그래서 명장의 삶은 옆에서 지켜볼 뿐이다. 예술을 향한 지독한 열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달을 바라볼 때처럼 느끼고 추측할 뿐이다.
한편 스트릭랜드의 예술을 향한 열망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면에서 순수한 세계이다. 이 작품이 출간한 1919년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지 1년도 안 된 시점이다. 이 전쟁은 인간 스스로에게 문명에 대한 신뢰를 혐오와 증오로 뒤바꿔 놓았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독자들에게 6펜스의 세계를 냉소와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스트릭랜드를 염모 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이 책은 출판과 동시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저자인 서머싯 몸을 작가로서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읽었으면 달라져야 진짜 독서』·서정현(북포스, 2018)
#독서 #사유 #실천 #의미재구성
독서의 목적은 문자의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 의미의 재구성에 있다. 저자인 서정현 작가는 자아를 주체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독서’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실현할 구체적인 방법(독서를 체화하는 의미 재구성 독서)을 제안한다.
이와 함께 중요한 독서를 일상화하는 방법, 중수 이상의 독서가가 되기 위한 방법, 독서가 우리의 인생에서 갖는 의미를 제시하며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추가로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책들에 눈에 띄었다. 책의 내용에도 언급되고, 저자도 추천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인 병행 독서(혹은 맥락 독서라고 저자는 정의했다)를 실제로 구현할 거리를 찾았다.
특히 ‘숙독 = 정독 + 사유 + 체화’로 정의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책을 읽기 위함에 있어서 ‘정독'만으론 부족하다. 펜과 메모를 이용해 주체적인 사유로 나아가야 하며, 형광펜과 반복 읽기로 체화하는 것으로 숙독은 완성된다. 독해 차원의 독서에서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독서 방법이 바로 숙독이다.
『나의 덴마크 선생님』·정혜선(민음사, 2022)
#대안학교 #덴마크 #세계시민학교 #삶의자세
이 책의 저자인 정혜선 작가는 기후 운동가이자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다. 차분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조차 힘든 한국,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달리는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실패와 절망뿐이라고 생각했던 저자는 덴마크의 세계시민학교(PC, 호이스콜레)를 서른아홉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도전한다. 이러한 경험은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했고, 인생의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곳에서 겪었던 사람들과의 다양한 경험을 잔잔하지만 따뜻하게 엮은 것이 바로 『나의 덴마크 선생님』이라는 책이다.
저자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자신의 여건을 덴마크의 세계시민학교의 교육과정과 따뜻한 선생님, 마음 맞는 동료들과의 만남을 통해 지혜롭게 헤쳐나간다. 정혜선 작가가 말하고 싶은 삶의 지혜는 ‘함께 기대며 살아가기'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이런 생각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위로와 동기부여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거나 중요한 선택 앞에서 고민 중인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또 한 가지 덴마크를 비롯한 노르딕 문화권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묘사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산과 계곡이 대부분이 우리나라에 비해 광활한 평지가 대부분인 덴마크의 모습은 그야말로 이국적이다.
『이상 소설 전집』·이상(민음사, 2012)
#날개 #새로운해석
이 책의 전부를 읽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날개』가 다시 읽고 싶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갑자기 이상의 ‘날개'가 읽고 싶었다. 굳이 읽고 싶었던 이유를 말하자면 한국인 작가의 글을 읽고 싶었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버텼던 작가의 글을 읽고 싶었다. 필자의 정체성을 나타낼 때 ‘한국'이라는 국적은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우리는 모두 주체적인 삶을 살고 싶지만, 21세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존재는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것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 가족의 형태, 신체적 조건, 성별 등의 생물학적 요소뿐만이 아니라 국적, 경제적 여건, 태어난 시기와 같은 사회적 요소도 ‘나'의 의사와 무관하다. 특히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느냐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은 사람들에게 일제강점기는 외면하고 싶지만 기억해야 하고, 무섭고 두렵지만 자랑스러운 이상한 정체성이다. 모순과 인지부조화를 넘어 양자역학적이다.
이러한 시대를 직접 살아보지 않은 지금의 우리들도 이런 설명하기 힘든 압박에 시달리는데 당시를 살던 사람들, 특히 글을 쓰던 작가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했을지 궁금하다. 그래서 이상은 박제된 천재가 되기로 한 것은 아닐까? 요즘 말로 태어나 보니 흙수저, 이상 작가는 태어나 보니 식민지였다. 코로나 팬데믹처럼 현재의 우리도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상처받았고 한편으로 무엇인가 깨닫고 있다. 무엇도 선택할 수 없다는 쓸쓸함, 비슷한 외로움을 느꼈을 이상. 그래서 『날개』를 읽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문화적 탄압과 구속에서 한글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느낌이었을지 궁금하다. 희망찬 미래도, 잔악한 복수도 머릿속 관념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는 현실은 ‘무기력'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날개를 달고 날아보자는 쓸쓸한 외침은 전적으로 거대 담론에 기댄 ‘독립’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상은 『날개』를 통해 그렇게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자기 모습에서 ‘박제가 된 비참한 천재'를 발견하고 이를 글로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자기 내면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허무한 메아리만 남는 현실, 자신을 껍질만 남은 박제처럼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단순한 열정』·아니 에르노(문학동네, 2012)
#열정 #정체성의상실 #오토픽션
프랑스 지식인 여성의 불륜 고백. 외국인 유부남과 ‘열정적'으로 사랑한 나의 내면의 모습을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문학작품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건조하고 평평한 문체가 오히려 매력적이다. 문학과 학문 사이의 어떤 것을 추구했다고 말하고 싶다. 실제로 저자인 아니 에르노 작가는 빈곤층 자녀로 태어나 중산층인 작가로 성장했다. 그리고 작품에서 등장했던 A라는 인물도 가공의 인물이 아니며 러시아 외교관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결국 저자 자신의 이야기라는 말이 된다.
자전적 소설의 형태라는 것이 그렇게 희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담백하고 건조한 문체에서 오는 현실감은 독자들의 시선을 단숨에 빨아들인다. 강렬한 이미지로 독자를 압도하는 첫 문단, 그리고 문단과 문단 사이에 의도적으로 삽입한 듯한 공백은 사회적 지위와 자신의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더욱 밀도 있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경계'에 서 있는 자의 불안감은 저자의 인생 행보와 닮았다. 부담스럽지 않은 부피의 책이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는 전혀 가볍지 않다. 오히려 저자의 문체의 한 요소로 느껴질 정도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자연스럽다.
『글쓰기의 최전선』·은유(메멘토, 2015)
#글쓰기 #읽기 #생각
저자인 은유 작가는 글쓰기 강좌를 직접 운영하며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글쓰기'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구축해 나간다. 그래서 이 책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한 가지 단어는 바로 글쓰기다. 저자는 글쓰기에 관해 1) 삶의 옹호 2) 감응하는 신체 3) 사유의 연마 4) 추상에서 구체로 5) 르포와 인터뷰 이렇게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각각의 주제별로 저자가 말하는 ‘글쓰기'의 정의는 그동안 필자가 생각해 왔던 글쓰기에 관한 인식의 틀을 거침없이 흔들었다. 이 책을 통해 사유의 지평을 넓힌다는 추상적인 개념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따라서 글을 쓰는 데 회의를 느껴 활기찬 동기부여를 간절히 찾는 독자들에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다. 글쓰기를 지겨운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의 정독을 추천한다.
『책 읽기가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김애리(비즈니스북스, 2021)
#책읽기 #독서법 #네줄독서기록
자기 인생에 진정한 ‘변화'를 바란다면 책을 읽어라. 이러한 책의 힘을 방황하던 시절에 직접 경험한 김애리 작가는 책이야말로 자신의 변화를 이끌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독서의 이유, 저자의 노하우가 담긴 독서법과 독서 습관을 키우는 법, 마지막으로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까지 자세히 다룬다. 독서를 하고 싶지만 어떻게 시작할지 망설이는 독자들에게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경험이 담겨있는 생생하고 친절한 문체는 독서 초보인 독자들도 책을 무리 없이 읽어 나가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특히, 꾸준한 독서를 이어가기 위한 동기부여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데 이를 위해 저자가 제시한 ‘네 줄 독서기록법’ 유용해 보인다.
『이동진 독서법』·이동진(위즈덤하우스, 2017)
#독서 #책 #이동진
영화 평론가이자 독서가 이동진 작가의 ‘책을 사랑하는 법’에 관한 이야기. 저다가 생각하는 독서의 이유와 방법 그리고 효과가 담백하게 담겨있는 책이다. 특히 재미를 독서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저자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다. 꾸준한 독서는 스스로 책을 읽는 재미를 느낄 때 시작한다. 독서가 습관이 되어 삶 자체가 독서인 그의 책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면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탄탄한 독서력』·곽동우(카시오페아, 2016)
#독서 #사고 #변화 #독서법
체계적인 독서법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 『탄탄한 독서력』은 소중한 희망과 같은 책이다. 독서의 양과 질에 몰두하는 잘못된 독서 습관은 척박한 교육 환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변화와 탐색 그리고 사고 중심의 독서를 강조하며 저자만의 노하우가 담긴 독서의 이유와 방법 등에 대하여 풀어 나간다.
『이상 소설 전집』·이상(민음사, 2012)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이상 소설 전집』, [83 p]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1936년 일제강점기 조선의 운명을 말하는 것일까, 그런 시대적 한계에 서 있는 이상 자신을 말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정처 없이 방황하던 지식인들을 지칭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모습은 유쾌하다. 시대도 자기 자신도 이런 상황마저 슬픔과 분노를 넘어 유쾌할 뿐이다.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가소로운 변명으로 이런 상황을 합리화하려 하지만, 그 끝에 새어 나오는 무기력한 조소는 막을 길이 없다.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자 식민지라는 현실에 대한 비웃음이다. 설국,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독자들을 저자가 창조한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적인 문장이다. 박제된 천재는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날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