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의 독서 기록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같은 곳에 다시 심각한 상처를 받는 일만큼 아프고 참혹한 일도 없습니다. 그 상처가 물리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는 상관없습니다. 10월의 마지막 주말, 평소처럼 게으른 휴일을 보내야겠다는 느긋한 결심은 청천벽력 같은 이태원 참사 뉴스로 순식간에 아팠던 곳을 다시 후벼 파는 끔찍한 상처가 됐습니다. 온종일 어떤 것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습니다. 읽을 책도, 써야 할 글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착잡한 마음에 브런치와 인스타그램 친구들의 글을 보며 댓글을 남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피해자 가족들의 참담한 마음을 100분의 1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깊은 위로와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새로운 글을 털썩 내놓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남겨진 자가 떠난 이들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슬픔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슬픔을 알려는 노력조차 없을 때 인간은 괴물이 됩니다. 괴물이 되기를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마지막 반항, 떠난 이들을 향한 기억과 남겨진 이들과의 공감입니다. 이제 올해도 두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연초에 가졌던 다짐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적절한 계절입니다. 아울러 슬프고 화가 나서 쓸쓸한 10월입니다.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만큼 여러분의 마음도 따뜻하고 풍성하시길 기원합니다. 다시 마음을 부여잡고 이번 달에 읽은 책을 소개합니다.
『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민음사, 2003)
#시대의충돌 #여성의삶 #편견
19세기 영국 여성들의 삶을 현실감 넘치게 그려냈다. 종교와 권위로 점철된 전통적인 가치가 중요했던 시대에서 개인의 능력, 신념, 가치관이 중요한 시대로 넘어오면서 ‘충돌과 갈등’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마찰이 심화하는 과정에서 항상 손해를 보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19세기 여성들은 자기 삶이 시대의 갈등에서 핍박받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의 취약 계층이었다. 하지만 저자인 제인 오스틴은 밝고 경쾌하게 여성들의 고뇌와 아픔을 『오만과 편견』을 통해 적나라하게 풍자했다.
단순해 보이는 두 여성의 ‘신데렐라’ 서사는 겉모습일 뿐이다. 제인과 엘리자베스를 둘러싼 사람들의 대화, 행동, 생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안타까운 현실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 시대의 여성들은 상속의 대상에서 아예 배제되기 때문에 삶을 이어 나가려면 어쩔 수 없이 부자와 결혼해야 한다. 개인의 취향과 전혀 상관없는 인물과의 관계도 그렇게 결정된다. 하지만 주인공인 엘리자베스는 다행히 자기 능력, 태도, 가치관으로 당시의 부조리를 이겨내며 행복한 결혼을 하게 된다. 저자는 반목의 시대를 버티는 여성들에게 이 책으로 ‘희망’을 선물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강신주(동녘, 2010)
#시 #철학 #사유
시와 철학의 지적인 만남. 시를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여러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주관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대화한다고 해서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글만으로 시인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더욱더 힘든 일이다. 게다가 그 글에 사용된 언어가 주관적, 함축적, 상징적이라면 해석은 고사하고 인식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반대로 철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난해한 부분은 철학자는 보편 진리를 추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유의 광활한 바다에서 등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진실을 발견하는 일이 철학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자는 고독과 고뇌의 순간들을 수없이 겪으면서 진실에 다가간다. 결국 닿지 못하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한 사유와 사고를 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철학의 본질이다. 이처럼 시와 철학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배우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둘을 같이 접하면 오히려 쉽게 둘 다 이해할지도 모른다는 놀라운 상상력을 한 작가가 있다. 그 어려운 일에 도전하고 빛나는 과실까지 얻어낸 책이 여기 있다. 강신주 작가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이 바로 그런 책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주체적인 삶을 꿈꾼다. 하지만 영원한 권력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키우는 데 열중한 나머지 주변을 돌아볼 틈이 없는 위선자들은 시인과 철학자의 탄생을 반겨하지 않는다. 개인의 기쁨과 자유를 교묘한 논리로 감추고서 더욱 근면하면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세뇌하고 있다. 이런 주입식 관습과 폐단을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하는 시인과 철학자가 그들에게 반가운 대상일 리 없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러한 시와 철학이 사유되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공멸뿐이다. 존재를 낯설게 바라보고 그에 대한 자신만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기쁨과 자유의 철학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그러한 여정에 든든한 동반자로 이 책은 손색이 없다. 따뜻한 철학, 명료한 시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이 책에는 있다.
시와 철학의 관계를 고찰하는 일이 이리도 아름답게 느껴질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저자의 풍성한 인문학적 지식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적인 문장들을 소중한 사진처럼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따라서 시와 철학의 숙명과도 같은 ‘난해함’은 오히려 즐거운 지적 유희의 대상이 된다. 저자의 해석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맨 앞에 등장했던 시를 다시 읽을 때의 뿌듯한 감동은 모든 독자들을 분명 매료시킬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의 따뜻하고 친절한 설명과 해석은 중독적이다. ‘과연 이 시는 어떤 철학자와 어울리는 것일까?’ 혹은 ‘다음에 등장하는 철학적 사유는 어떤 것일까?’라는 생각에 조바심마저 생긴다. 따라서 상당히 두꺼운 책이지만 끝까지 읽는 데 큰 공을 들였다는 생각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시와 철학이 소개되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그 정도로 가독성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가을밤을 시와 철학으로 우아하게 물들이고 싶다면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펼쳐보자.
『비낭만적 밥벌이』·김경희(밝은세상, 2021)
#프리랜서 #작가 #글쓰기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솔직하고 따뜻한 돈벌이 안내서. 학생에서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의 변화를 겪으면서 막연하게 느꼈던 ‘돈벌이’의 어려움을 작가라는 찬란한 로망으로 승화시킨 이야기이다. 김경희 작가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어른들의 답답한 조언을 몸소 느끼면 프리랜서에서 서점 경영인으로 거듭 발전한다. 또한 무엇하나 확실하지 않은 혼잡한 과정을 거치는 와중에도 ‘글쓰기’를 놓지 않았다. 이러한 고독한 끈기가 있었기에 당당히 이 책의 ‘저자’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작가를 꿈꾸고 있지만 현재 자신의 환경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에 권하고 싶은 책이다. 작가가 되려면 현실도 이상도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곰출판, 2021)
#분류학자 #물고기 #우생학
과학 전문 기자가 바라본 ‘분류학자’의 인생. 어류에 대한 과학자(분류학자) 집착과 같은 열정은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어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생을 들여다보는 일은 단지 한 인간의 여정을 관조한다는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는 인류의 기원을, 우주의 카오스를, 신의 존재를 같이 고민하고 함께 사유한다.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한 목적도 단지 한 어류학자의 인생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관찰 대상인 데이비드는 왜 그토록 ‘어류’에 몰입했는지 그 답을 찾는 과정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진정한 목적이다.
진화와 물고기 그리고 과학에 관한 책이지만, 이 책의 결말을 말하는 것은 앞으로 이 책을 읽을 사람에게 큰 피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야기의 구조에서 ‘반전’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학책에서 반전을 느낄 정도의 서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저자의 글을 끌고 가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고기와 분류학자 그리고 거기에 존재하는 반전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끌어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과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느껴 과학 서적을 펼쳐 보지만 딱딱한 과학 교양서에 지친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달의 책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강신주(동녘, 2010)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
시와 철학은 인문학의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와 철학은 모두 이성복의 말처럼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해" 친숙한 세계를 낯설게 하는 인문학의 본령에 충실한 것들입니다. 앞서 말한 뇌과학의 현대 이론이 타당하다면 시는 정서와 철학은 사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겁니다.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19 p]
시와 철학의 역할. 인문학과 우리의 삶에서 시와 철학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그 역할과 위치가 조금 더 명확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우리가 이 책을 읽고 시인과 철학자로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권력과 관습은 인간의 자유와 기쁨의 사유를 교묘하게 감추려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