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자키스 | 책리뷰
벌써 12월이다.
가을의 쓸쓸한 정취를 느끼기도 전에 삭막한 겨울이 와버렸다. 기억하기도 전에 잊어버린 추억처럼 올 한 해도 무심하게 그렇게 가고 있다. 언제나 내게 지나버린 1년은 항상 '작년'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한 덩어리의 시간일 뿐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빠른 세월만큼이나 미운 게 나의 기억력이다.
올해 시작은 물론 어제의 일까지 도무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나에게 책도 언제부터인가 그런 존재가 돼버렸다.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무슨 내용의 책이었는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 책이 하나 둘 늘어난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고 있다. 올해 마지막 한 달은 다시 읽고 싶은 책을 골라서 읽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중 『그리스인 조르바』 가 생각났다. 처음 읽었을 때 분명 좋은 느낌이었는데 왜 좋았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읽고 싶어진 이유가 하나 더 있다. '70년을 기다렸다! 한국 최초 그리스어 원전 번역'이란 설명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동안 내가 읽었던 『그리스인 조르바』 는 그리스어 - 프랑스어 - 영어 - 한글의 복잡한 번역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었다. 70년 만에 그리스어를 직접 한글로 번역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조르바를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이니 말이다.
『고대 그리스사』에서 토마스 R. 마틴은 "고전을 다시 읽으면 당신은 그 책 속에서 전보다 더 많은 내용을 발견하지 못한다. 단지 전보다 더 많은 당신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나도 그랬다.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하는 것, 다시 말해 '자기 객관화'는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호모 사피엔스가 갖춰야 할 기본 소양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카잔자키스는 나를 반갑게 반겨주었다. 그렇게 조르바와 함께 지중해 문명이 시작한 섬, 크레타로 빠져들었다.
카잔자키스 이름의 한글 표기
카잔자키스의 우리말 표기는 보통 '카잔차키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그의 '그리스어 이름 표기는 Καζαντζάκης인데 세 번째 음절의 자음 [τζ]는 유성 파찰음이므로 이에 대한 한글 표기는 [지]이지 [치]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카잔자키스'여야지 '카잔차키스'여서는 안 된다. 처음 누군가가 잘못 표기한 것이 굳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계속 쓰는 것은 옮지 않다.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해제에서 발췌)
이 작품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것은 화자인 나와 조르바의 만남과 크레타의 외딴 바닷가에서 그와 함께 갈탄광을 개발하면서 겪은 사건들과 그들이 나눈 대화들이다.
사실 이 책의 서사는 그렇게 정교하지 않다. 흥미진진한 사건, 사고 없이 단순한 구조로 진행되기 때문에 서사의 구조에서 매력을 느낄만한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또 읽는 이유는 '조르바'라는 인물의 매력 때문이다. 독자들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점점 그를 동경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카잔자키스는 이 책을 통해 크레타가 아니라, 조르바라는 여행지에 우리를 초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 가을의 달콤함, 빛으로 멱을 감은 섬들, 그리스의 영원히 벗은 몸에 옷을 입히는 투명한 이슬비. 죽기 전에 에게 해를 항해하는 영광을 누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사람들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사랑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카잔자키스라는 대가의 손에서 그려지는 풍경 묘사를 꼽을 수 있다. 그의 절제된 문체로 이루어진 수려한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지중해의 낭만과 여유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위의 문장뿐 아니라 크레타섬의 천해의 자연을 카잔자키스만의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본 풍경 묘사가 책의 곳곳에 숨어있다. 이런 문장을 만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리스를 여행하는 느낌으로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카잔자키스의 수려한 풍경 묘사 덕분이다.
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아름다운 풍경 묘사에 매료돼서 직접 그리스를 찾는다면, 대부분은 상상했던 것보다 초라한 풍광 때문에 실망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석회질 성분이 많아 풀과 나무도 없는 메마른 산과 단조로운 해안선은 우리가 꿈꾸었던 크레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리스의 역사도 우리의 기대와는 많이 다르다. 서양 문명 특히 유럽 문명의 최초 발생지는 크레타섬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웠던 그리스는 B.C. 5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참혹한 내전으로 패망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B.C. 337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굴욕적인 지배를 받게 된다. B.C. 1세기는 다시 로마의 지방 속주로 전락하며 16세기 이후에는 다시 오스만 제국에게 400년 가까이 지배당한다. 그리스의 민중들은 2000년 가까이 국가가 없이 살아온 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의 시대는 크레타의 독립전쟁과 마케도니아 독립 투쟁, 그리고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등으로 암울했던 시기였다. 그리스의 지식인이자 대문호 카잔자키스는 이러한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가운데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저술했던 것이다.
조르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실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실존이란 관념의 정반대편의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고, 생각, 형이상학보다 지금, 여기, 실체가 중요한 것이 실존이다. 그의 철학은 책과 이론을 통해 교육된 철학이 아니라 자신만의 경험과 실제 생활을 이루며 체득한 철학이다.
조르바는 우선 그리스 정교를 부정한다. 수도원에서 그가 저지른 일은 부정을 넘어 신과 종교를 향한 조소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또 19세기 유럽을 집어삼켰던 '민족주의'를 부정한다. 조르바에게 국가란 그저 해방해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터키인이냐? 그리스인이냐? 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이다. 당시 그리스의 지배적인 상식을 거침없이 부정한 조르바는 카잔자키스의 철학적 로망을 형상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넌 절대 내 움막에 못 들어와, 이놈아! 내가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을 테니까! 내 모닥불도 못 끄지! 절대 내 움막을 무너뜨리지 못할 테니까!" 조르바의 이 말을 들으며 내 영혼은 용기를 얻었다. 그때 나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결핍의 여신한테 어떻게 대꾸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나는 바닷가를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보이지 않는 적에게 소리쳤다. "너는 내 영혼 안으로 절대 들어올 수 없어.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을 테니까! 내 불꽃을 끌 수도 없어! 넌 나를 무너뜨릴 수 없을 테니까!"
조르바와 동거 동락한 '나'는 많은 것이 변했다. 조르바는 카잔자키스에게 알베르 카뮈이자 장 그르니에였다. 책과 먹물의 세계에서 관념을 관성과 동의어로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살았던 나는, 이제 실체와 실존의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무엇에도 의지할 필요 없는 나를 위해 과감히 상식과 세상의 시선을 무심하게 뿌리치기 시작한다.
진정한 인간의 자유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생각과 관념, 종교의 교리, 행위 양식은 물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도 결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제한하고 속박한다. 그래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집중을 의미한다.
그러고는 곧바로 베개에 기대 일어나서는 침대 시트를 벗어던지고 위로 펄쩍 뛰었습니다. 그의 부인 리우바와 나, 그리고 힘센 이웃들 몇 명이 그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만 그는 이를 뿌리치고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까지 갔습니다. 그곳에서 창틀을 쥐고 서서는 먼 곳 산을 바라보며 눈알을 굴리더니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말 같은 신음소리를 내다가 창틀에 손톱을 꼿꼿이 박아 넣고는 똑바로 서서 죽었습니다.
조르바는 최후까지 인간다운 인간이란 무엇인지 보여주고 떠난다. 죽음도 조르바에겐 추상이나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닌 실체로 받아들인 것이다. 카잔자키스가 조르바의 말과 행동에 자신의 시대적 고민을 투영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저자의 묘지에 새겨진 비명 때문이다. 그의 묘지엔 이렇게 적혀 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고독할 수 있음이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책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자 조르바의 가장 매력적인 모습이다. 종종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는 사람에게 '이상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여 비난의 대상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참혹한 상황에서도 불가능한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것만큼 비천한 현실도 없다. 우리가 조르바를 동경하는 '나'를 그저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카잔자키스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왔던 조르바를 그리스 민중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은 건 잘한 것 같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는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학문적이자 영적인 스승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성인으로서의 번민과 영성적 고뇌의 진정한 해답은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이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그리스를 비롯한 세계는 전쟁과 반목으로 암울해 있었다. 저자의 고향인 크레타도 예외는 아니었고, 이런 혼돈의 세상에서 희망이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우연처럼 필연적으로 만난 조르바는 ‘나’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했다. 조르바와 나누는 대화, 함께했던 식사, 영혼을 나누었던 춤은 지식인의 자기 합리화로 똘똘 뭉친 나를 새롭게 만들었고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다시 고민하게 했다.
‘인생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는 어디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와 같은 진지한 고민에 둘러싸여 있는 모든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조르바의 말과 행동은 우리 인생의 다양한 고민거리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헤쳐나갈 힘과 용기를 준다. 이 책의 한 가지 불편한 것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비인권적인 태도이다. 시대 보정을 고려한다 해도,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그러한 단점을 포함해도 읽을 가치는 충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 해외여행을 계획한다고 하면, 다들 울먹거리는 이상한 시대가 돼버렸다. 소중한 것을 흔하다는 이유로 등한시했던 우리에게 일종의 경종이 되었지만, 여전히 여행은 그리운 것이다. 문명의 발상지이자 카잔자키스의 고향 크레타로 여행 가고 싶다면 그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보자. 그 안에는 유럽과 중동과 아프리카를 살갑게 품은 지중해의 낭만과 열정이 가득하다. 카잔자키스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난 크레타는 여러분에게 잊을 수 없는 여행을 선사한다.
그곳에 가면 조르바와 멋진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카잔자키스 | 문학과지성사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