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 살 때쯤 애월 외가에 갔을 때 정지 앞 자그만 대나무 숲 옆에 키 큰 눌이 서 있었다.
덩굴이 그 위로 뻗어 호박이 앉아 있던 것 같고, 이른 아침에 굴묵에 불 때는 큼큼한 풀 연기 냄새에 눈 뜬 시내따이(시내에서 온 아이)가 먼먼 이방의 독특한 냄새가 가득한 올레길을 황홀한 느낌으로 걸어보던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사진처럼 강하게 남아있다. 그때 교통수단으로는 자주 갈 수는 없던 곳이어서 외가에 대한 기억은 짧지만 더 강렬히 남아 있는 것 같다.
90년대만 해도 동네에 드문드문 보이던 눌들을 그리러 야외스케치 다니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정말 보기 힘들어졌다.
짚은 과거의 생활양식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존재였다.
제주의 곡식은 반이상이 보리였으니 사월이나 오월절에 곡식을 고실하고(거두고) 나락을 훑어 몰방애간(말방아간)에서 곡식으로 찧고, 짚은 집 가까운 곳에 눌을 만드어 쌓아 두었다.
집주변에 만들어 둔 눌의 모습과 마을 바깥에 쌓아 둔 눌에서 짚을 이어다 나르는 모습.
제주의 마을은 촌락의 일터가 어디인지에 따라 세 가지 구역으로 나뉜다.
바닷가 가까운 곳에 해촌, 목장과 삼림이 가가운 산촌, 두 가지를 겸하는 양촌이다.
1900년대는 해산물판로가 좋은 해촌에 인구가 가장 많았다. 해안가 가까운 경작지는 그리 면적이 크지 않아서 각자 집에서 먹을 것을 재배하는 정도였고, 외곽에 넓은 경작지가 있었다. 마을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의 목장이 있었다.
이곳에 농번기 동안 소나 말등의 가축을 방목한다.
겨울에는 고지가 높은 이곳에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목초를 베어서 눌을 만들어 두는데 이렇게 자기가 베서 쌓아 둔 것만 자기의 소유가 된다. 눌은 지면에 돌 또는 나무로 지름 10미터 정도의 바닥을 돋우고 위에 짚을 4미터 이상높이로 쌓는다. 그 위에 노람지(이엉)로 지붕을 만들어 꼭대기에 주젱이를 씌워 완성한다.
"눌이 커도 주젱이가 으뜸!" 이라는 제주 속담도 있다.
양촌과 산촌에서는 소똥이나 말똥이, 해촌의 주 연료는 눌이었다.
얇은 토양층의 제주의 땅
토질이 비옥하지 못한 탓에 노동량에 비해 소출이 작은 제주 화산토에는 거름을 넣어주고도 윤작을 해야 했는데 보릿짚은 돼지의 분변과 섞어서 다음 해 농사를 책임 질 2 넣어주어야 하고 고운 짚은 임산부가 아이를 출산할 동안에 방안에 깔아 두었다가 태를 사서 불에 태우는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지충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서양의 눌
가난한 시절 먹었던 음식들은 '지겹도록 먹어서' 더는 먹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