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을 운영하다 보면 망하지 않는 이상 여러 VC로부터 투자를 받게 된다. 당시 내가 있던 스타트업도 2016년 법인전환하여 2020년 말까지 약 4~5곳의 VC로부터 투자를 받았던 것 같다. 새로운 VC가 유입될 때마다 그 VC의 성향에 따라 잘 대응해야 하고 투자 시점 및 투자 지분에 따라 상대적인 영향력이 다르겠지만 투자회사 간의 의견 조율을 잘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여러 VC로부터 투자를 받게 되면 어째나 저째나 시어머니 같은 VC도 결국 만나게 된다.
벤처투자 계약서 표지
나는 벤처투자 계약을 하러 투자사에 갔던 경험이 있다. 부산에서 첫 KTX를 타고 서울에 올라오니 9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 서울에서 출근하는 사람들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다는 동질감과 나만 조금 무언가 다른 듯한 이질감을 동시에 느끼며, 투자사로 발길을 옮겼다. 학창 시절 금융권에서 근무하는 것에 잠깐 관심이 있었기에 나름 설레기도 했다.
투자회사에 도착해서는 업무담당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본격적으로 계약서에 날인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VC로부터 투자받은 금액은 약 12억 정도였다. 매 장마다 간인을 찍어야 했는데 약 30페이지의 계약서 3부를 찍어야 했으니 도장만 100번 찍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날인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참 손에 힘도 많이 들어가고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끄러웠던 것은 도장을 다 찍고 난 뒤 내 손이 인주로 범벅이 되었다. 조금 더 프로페셔널 해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휴지로 도장과 손을 닦으면서도 계약을 처음 맺는 듯한 스멜을 풍겼을 것 같아 부끄러웠다.
약 30페이지 총 3부의 계약서 = 100번의 간인
계약서 날인을 마무리하고 점심을 하기 위해 조용한 룸이 있는 일식집에 갔다. 사실 나는 많은 얘길 나누고 싶지 않아서 밥을 따로 먹고 싶었지만, VC 측에서 밥을 같이 먹자고 했다. 좋은 식사자리였지만 식사에는 집중을 하지 못했다. 앞으로의 마케팅전략, 운영 계획 등과 같은 투자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들을 늘어놓으며 나름의 방어전을 치러 냈기 때문이다. 참 혼자 가는 출장은 자유로운 면에서 좋은 점도 있지만 회사를 대표하는 역할인 만큼 책임감이 뒤따르는 부담감도 있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요즘에도 날인을 할 일이 종종 있는데 나는 아직도 손에 인주를 범벅으로 묻히곤 한다. 예쁘게 잘 찍으려고 힘주어 누르다 보니 더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손에 묻은 인주를 닦을 때마다 그 시절 벤처투자계약서에 날인하던 날을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