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서 슬픔만은 가져가지 말아주세요.
큰 비단잉어들은 수명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끔
영원히 살고 싶기도 해,
내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날 잊을 정도로, 네가 영원하면 좋겠어요.
Lilith,
난 당신을 행복하게 하나요.
……
커서는 깜빡이고 있다. 다음 문장을 기다리면서 문을 두드린다. 다시 글을 시작하려다가 괜히 뒷머리를 만져보았다. 너무 짧아졌나? 이전의 머리 긴 사진을 본다. 참 머리가 안 기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것 같다. 모든 게 상대적인 것이겠지,라고 매일 생각하는 도중에도 머리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자란다. 이렇게 머리가 단정했던 적이 있었나. 어릴 때는 항상 단정하게 자르고 다녔고 대학 때는 염색이나 펌을 하고 다녔다.(생각해 보면 그렇게 희한한 염색을 하지도 않았다.) 그 당시 염색은 어떻게 했지? 지금 생각하면 10대 시절 염색이나 탈색을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방법을 잘 몰랐을 테고, 시간이 지난 지금에 그냥 밝은 갈색? 염색약 같은 것을 사가지고 집에 그냥 왔던 것 같다. 그리곤 설명서를 잘 읽었으려나? 그럴 리가 없지, 대충 훑어보곤 비벼서 자취방 거울 보면서 그냥 막 발랐겠지. 원래 20분 정도 유지하고는 머리를 감았어야 했지만 오래 하면 색이 진하게 되겠지? 하고 한 시간 넘게 있었던 기억. 그것은 일종의 갈 곳 없는 분노의 표출 같았다. 어쩔 수 없었던 많은 것들.
20대가 되어 자신의 삶을 시작했다고 항상 생각한다. 단정하고 모범적으로 생활해 왔던 것들, 혹은 그렇게 행동해야만 했던 것들이 꽤 나를 억눌렀던 것 같다. 또한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잘 배우지 못했다. 자기 주도적으로 생각하는 방법, 실생활을 살고 자신을 운영하는 법, 사람들과 잘 지내는 법 등. 아마 가정 내에서 스스로 안정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소한 일탈이나 실수에 대한 대가가 가혹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일탈과 처벌에 관련된 기억들이 애벌레가 파먹은 넓은 잎처럼 비어버렸거나 날아갔다고 느낀다. 기억이 삭제된 것 같다. 또한 학창 시절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없었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현실적으로 무방비한 상태는 스스로의 삶을 어지럽히곤 했다. 그리곤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은 부모와 학교를 원망했다. 대학 기숙사에 짐을 내려주고 입학식을 마친 후 함께 감자탕을 먹었다. 포항으로 내려가는 양친의 얼굴은 슬퍼 보였다. 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했던 걸까? 슬픈 것은 저에요.
그날은 비가 내렸다.
지금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정말 맘에 드는 미용실을 찾았기 때문이다. 나에겐 여러 가지 세분화되어 있는 슬픔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머리를 예쁘고 맘에 들게 하고 다니지 못한 시간들에 대한 슬픔이다. 정말 슬프다. 아기 시절을 생각하면 머리를 어디서 잘랐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앞머리를 친할머니나 엄마, 어머니가 도토리처럼 잘라주셨던 기억이 강렬하게 난다. 그걸 보곤 난 울었는데 어른들은 재미있어했단 말이지, 너무하다. 난 서러운 눈물이었는데. 어쨌든, 다시 돌아가서 초등학생 때는 머리를 어디 가서 잘랐는지 기억은 안 나고, (아마도 동네미용실이었겠지.) 중학생이 되어서는 되도록 학교에서 잘랐던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 지금 생각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하시는 아저씨가 계셨다. 그 아저씨는 아마도 떠올려봤을 때 30대 중후반이었을 것 같다. 당시에 학교에는 꽤 큰 체육관이 있었는데, (지금도 있다.) 거기서 근무하시는 아저씨가 한분 계셨다. 당시 그의 보직은 이발사로 학생들의 머리를 잘라주었다. 가격은 3천 원이었다. 이발소 아저씨는 약간 상고머리? 스타일의 순박한 인상의 사람이었는데 그의 이발소는 작은 합주실 정도 크기였고 조금 직사각형으로 길었다. 송곳니가 약간 덧니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는 게 귀여우셨다. 중학생 당시 나는 뭐라 할까 아주 단정한 머리를 하고 다녔어서 이발사 아저씨는 매번 단정하게 잘 잘라주셨다. 이발기로 옆, 뒤를 깨끗하게 밀어주셨고 면도칼로 구레나룻을 일자로 딱 각을 잡아서 면도를 해주시면서 마무리를 해주셨다. 약간 앞머리는 멋쟁이처럼 길게 해 주셨는데 그게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많은 친구들이 거기서 머리를 깎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항상 혼자 갔고, 주변인들도 거기서 머리를 잘랐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아무와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노는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노는 것 같은 애들과 얘기해 본 적도 없었고(걔들은 뭔가 머리가 멋졌다.) 그 친구들의 머리를 봤을 때 그 아저씨가 잘라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하튼 이발사 아저씨의 이발소는 체육기구를 보관하는 공간의 역할도 했어서 거기엔 다양한 공들이 모여있었다. 체육관에서 하는 체육수업 때는 종종 이발소에서 공을 꺼내왔다. 그 아저씨는 어떻게 학교에 들어와서 이발사를 하고 계셨던 걸까? 중1 때는 거의 거기서 머리를 잘랐던 것 같고 왜냐하면 깔끔하게 해 주셔서, 그 이후에는 동네 곳곳의 미용실에 다니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당시로부터 다양한 머리모양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그 이발소는 없어지고 다른 것으로 바뀐 듯했다. 아마도 밴드부실로 바뀌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 종종 아저씨를 마주쳤을 때는 학교의 이곳저곳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계셨다. 그가 이발할 때 입었던 하얀 가운은 꽤 잘 어울렸는데 바보 같으면서도 곱상하고 깔끔한 느낌이었는데 그걸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쉽다. 그 아저씨는 아직도 학교에 근무하고 계실까? 종종 그가 그립다.
예쁘고 멋진 머리를 하고 싶다는 욕구는 나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만족스럽게 멋지고 혹은 거울에 비친 내가 멋지다는 것을 인지하고 싶어서이다. 딱히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밖에 멋지게 돌아다니고 싶다, 그러면 머리가 멋져야지, 하는 욕구의 단계가 자신 안에 있었다. 머리가 멋지면 나 스스로 자신감이 생긴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주목받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당시에 많은 미용실들에서 일본스타일 헤어 관련 멋진 사진을 엄청 붙여놨단 말이지, 그게 참 멋져 보였다. 머리 결이 엄청 섬세하게 세팅되어 있는 헤어모델 사진들이 참 멋졌다. 그래서 미용실 밖에 커트, 파마, 염색, 그리고 '샤기컷'을 한다고 많이 써놨었는데, 그 샤기컷이라는 게 이름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 나도 샤기컷하면 멋지겠지?(쓰면서 웃음이 난다) 그러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미용실 값도 지금 기억으로는 5천 원 정도 했는데 샤기컷은 더 비싸게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두리번거리다 들어가서 미용사 아주머니에게 쑥스럽게 '샤기컷해 주세요....' 하며 머리를 자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샤기컷'이라는 게 옆이랑 뒤를 깔끔하게 미는 건 똑같은데 윗머리를 숱가위로 숱을 쳐서 좀 더 팔랑거렸다. 미용사 아주머니도 그 일본스타일의 샤기컷 실력을 잘 구사하시진 못했던 것 같다. 그냥 상고머리로 자르고 위를 숱 쳐주는 게 다였다. 근데 그걸 하고 나면 그렇게나 기분이 좋았다. 그리곤 꼭 왁스를 발라달라 했다. 숱을 가볍게 하는 게 결국 머리 세팅하기 쉬워지고 표현하기가 편해지는 것이니까, 왁스를 바른 내 모습은 항상 맘에 들었다. 그것도 생각해 보면 어떠한 저항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샤기컷을 한 내 머리 가지고는 별말씀이 없으셨다. 머리가 왜 그래?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엄마가 알아달라고 '샤기컷'으로 자른 게 아니니까, 상관없었다. 난 이미 최고 멋진 사람이었다. 안경도 무테안경이었고 무서울 게 없었다. 샤기컷하고 왁스 바르고 무테안경을 쓰고 나는 자전거를 최고 속력으로 밟으면서 등하교하는 사람이었고 야자가 끝나면 사거리다방 옆의 호돌이오락실에 혼자 가서 코인노래방에서 버즈 노래를 5곡 넘게 열창하는 사람이었다. 가면 노는 친구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그들은 공부만 안 할 뿐 그들도 착한 애들이었다. 날 건드리지 않았고 자기들끼리는 몰래 담배 피우고 수다 떨고 놀았다. 오면 '어~' 하고 불러주었다. 그게 참 좋았네. 응 안녕, 하고 코인노래방 들어가서 겁쟁이랑 가시 열창하고 자전거 타고 집에 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 자신과 단 하나도 바뀌지 않았던 것 같다. 단지 고등학생은 정말 재미가 없었다. 자주 공부에 잘 집중을 못했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중학교 때는 교실이 가장 높은 층에 있어서 좋았는데 고1 때는 2층이어서 싫었다. 그래도 고2, 고3 교실은 높은 곳에 있었다. 중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사립학교여서 고2, 고3 때는 중1 때 있었던 교실이 운동장 건너로 보였다. 그게 조금 위안이 되었다.
내일을 살아 맞이할 수 있을까, 차라리 눈을 뜨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밤들. 스스로에게 완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 삶을 이어가는 것, 그것은 마치 밭을 갈다 쟁기에 걸린 큰 돌을 빼지 않고 어떻게든 질질 끌고 가는 것과 같고, 그와 동시에 나는 지쳐있다. 자의식의 메시지가 잔뜩 적힌 메모지로 가득 찬 방에 혼자 있다. 구겨진 일렉기타 소리와 비명소리, 인간은 왜 존재하나. 받는이가 없는 편지를 쓰고 책 속에 쑤셔 박아 던져버렸다. 실패와 좌절감, 죄책감들. 인간 그 자체와 관계성, 자신의 존재, 존재의 효용성 그 너머의 영원함에 대한 고민들. 오늘은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 저 너머를 엿볼 수 있다면. 각 존재는 자기 외부에 있는 불특정한 다양한 개체들과 온전한 합일이 가능할까. 내 존재만큼이나 세상에 뿌려져 있는 수많은 존재들은 얼마나 각자의 이야기가 많을까. 그들은 모두 파란 얼굴을 하고 있으며 두 눈은 비어있다. 그러면서도 모두는 숨을 쉬고 있고 너무 소름 끼쳐서 차라리 고이 접어 서랍에 담겨 나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적으면서도 인간, 난 그것들을 동경한다.
인간 그것들은 10의 28 제곱개 정도의 원자가 다양한 형태로 결합된 혼합물. 규소, 산소, 알루미늄, 마그네슘, 철이 풍부한 푸른 행성에 살아가고 있다. 각 개체로 존재하는 그들은 집단이다. 붉은 피가 흐르는 생물종이다, 각자는 다양하게 변형되었지만 결론적으로 유전자에 사로잡힌 굶주림 그 자체이다. 조금 발전했으며 번식과 생존에 특화된 신체를 가졌지만 그렇다고 뚜렷하게 진보하지 못한 생물. 원시시절의 유전자에 사로잡혀 눈앞의 것을 갖는데 혈안이 되며,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고, 우주 속에서 먼지만도 못하나 나약한 자의식은 우주만큼이나 비대하여 스스로의 존재 증명에 한 순간도 빠짐없이 눈이 멀어버리는 그들은
인간,
스스로에게서 깨어나지 못하는 인간이다,
나는 인간이다.
Lilith,
당신은 백 년이 되지 않는 삶의 무게를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세상에 떨어진 순간 온전히 나였음을,
세상에 눈을 뜬 순간 온전히 혼자 임을.
다-이,
다 - 이루었다.
kyrie eleison (이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kyrie eleison (이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kyrie eleison (이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발밑으로
서서히 물이 차올라 잠기고 있을 뿐.
언제나 뭔가 해결하고 싶다고 생각해.
해결한다는 것은 뭘까?
아무것도 해결되지는 않아.
영원히 살고 싶다고는 생각해,
하지만 영원함은 금지야.
첫 정규앨범 발매 1년이 지나기 전에 발매하는 쪽빛물색(Water blue indigo)은 '짙은 푸른색을 띄는 물의 빛'을 뜻하는 제목으로 '푸른 수면에 비치는 빛의 아름다움'을 담은 청량한 모던록 사운드의 싱글이다. 어떠한 세계와 표면도 아우르는 물의 포용성과 그 수면에 비치는 빛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앨범 커버 이미지,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악곡. 그 위로 목소리는 '살아갈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 감성적이며 시적인 가사와 이를 표현하는 부드러운 목소리의 존재는 발 밑으로 물이 차오르는 나날들 속에서 숨 쉬고 있으며, 어깨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영혼들의 무게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영원한 연결을 향한 기억나지 않는 꿈과 푸른 책장의 끝없는 투쟁 속에서 생生을 향한 목소리는 살아있는 의미를 찾기 위해 노래한다. 변박(5박)으로 전개되는 매스록(math-rock)의 고조감과 함께 EBS 헬로루키 라이브영상으로 발매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영원한 연결을 향한 기억나지 않는 꿈, 푸른 책장으로 표현된 물, 그 아래 잠긴 전하지 못한 편지들이 쓸쓸한 보컬과 폭발적인 연주에 실려 전해지길 기다리고 있다. 어느 세계로든 흐르는 물의 에너지와 어떠한 표면도 채우는 포용성, 그 수면에 비치는 빛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악곡. 그 위로 목소리는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저 살아있고 발 밑으로 물이 차오르는 나날들, 떠난 지 백 년이 되지 않은 영혼들의 무게는 산자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영원한 연결을 향한 기억나지 않는 꿈과 푸른 책장의 끝없는 투쟁 속 생生을 향한 절규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1. 쪽빛물색 (Water blue indigo)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한 아침
눈을 뜨고 지난밤 꿈들을 생각하네
기억나지 않아 기억나지 않아
한순간 너의 파란 얼굴이
길었던 시간을 살아오면서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눈, 영원함을 찾았네
절절하게 쓴 새벽 편지들
끝까지 전하지 못한 채 푸른 책장 속에
잠겨진 그대로
그 안에 모든 것을 적어내고 덮어버린 내게 남은 건
비어버린 눈
아무것도 남지 않은 존재를 위해 노래하네
비명이 되어버린 존재에 대한 의문
살아가는 의미를 찾기 위해 살아가네
노래하는 의미를 만들기 위해 노래하네
길었던 시간을 살아오면서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눈, 영원함을 찾았네
절절하게 쓴 새벽 편지들
끝까지 전하지 못한 채 푸른 책장 속에
잠겨진 그대로
길었던 시간을 살아오면서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눈, 영원함을 찾았네
기억나지 않아 나지 않아 나지 않아
기억나지 않아 나지 않아 나지 않아
기억나지 않아, 나지 않아
2. 藍の水色
また生きるかどうか思った朝
目覚めて夜の夢を思い出す
思い出せない 思い出せない
一瞬のあなたの顔が
長い時間を生き残って
道から出逢った人の目で光を見つける
切切に書いた手紙は
致し方なく生きた時間の本棚へ沈めている
その中へ全てを認めて、後に残ったのは
何も映らない目 空っぽになった人のために歌う
悲鳴になった僕の存在への疑問
生きる理由を探すために生きる
歌う理由を作るために歌う
長い時間を生き残って
道から出逢った人の目で光を見つける
切切に書いた手紙は
致し方なく生きた時間の本棚へ沈めている
思い出せない 出せない 出せない
思い出せない 出せない 出せない
思い出せない 出せない
3. Water blue indigo (inst.)
credit
cotoba
DyoN Joo vocal/guitar
Dafne guitar/producer
SEI bass
Minsuh drums
composed by Dafne
lyrics by Dafne
arranged by cotoba
played by cotoba
drums recorded by Hakju Chun
at Mushroom recording studios
vocal/guitar/bass recorded by Kang Jaewook
at Sanche Studio
Mixed by Kang Jaewook at Sanche Studio
mastered by Kang Seunghee
at Sonic Korea Seoul Forest
cover designed by TAETAE_FOREST
Psychederhythm Standard-T Limited (Main riffs, Rhythm, Lead)
- Analysis cable modfied
Fender Japan Hybrid 2 Jazzmaster Ishibashi Gakki Limited (Arpeggio)
- Analysis cable modfied
UAFX Dream 65
Bondi Sick as mk3
Boss bd-2 maketune mod
Proco Rat 90's
Magdoemuseu custom ca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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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owsky Metro Express 5 strings
Groove shoppe gs-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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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are : Gretsch USA Custom Black Copper 14*5"
Cymbals : Zildjian A New Beat Hi Hats 14" / Zildjian A Sweet Ride 21" / Zildjian A Thin Crash 18", 19" / Sabian HHX Evolution O-Zone Crash 18"
Pedal : DW 9000 + Marshmallow Beater Standard
Drum sticks : Vic Firth American Classic 5A
나라는 인간은 스스로에게 흥미로운 생명체이다. 그리고 슬픈 노래 밖에 만들 수 없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는 말을 자주 쓴다. 왜 생각한다고 자주 쓰는 걸까? 내가 나를 너무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을 멈추기는 어렵다. 잡다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생각들은 연결되어 있고 세분화되어 있다. 하지만 잡다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여전히 스스로에 대해 알 수 없다. 상실이란 것에 대한 과해석으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르지만 만든 모든 곡들이 슬프게 느껴져서 생각해 보면 난 슬픈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슬픔의 중독성에 빠져버린 것일까? 기쁨의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밝고 웅장한 클래식음악의 도입부나 섹션들에서 큰 감동을 받기도 한다. 단지 기쁨과 슬픔사이 중간 감정의 분포도가 낮아 보인다. 시선 자체가 내부로 향하다 보니 슬픈 것들이 많이 보인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다가 세상을 둘러보면 자신의 내면 속 슬픔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이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기쁨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풍부하다는 것을 순간순간 인간들에게서 발견한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지도
추신
저희는 아티스트들에게 무언가 항상 받아왔습니다. 저와 저희들은 우리 음악을 듣고 보고 읽는 분들께 어떤 것을 드리고 있나요.
cotoba
밴드 cotoba는 물리적으로 쌓는 변칙적인 박자와 화성을 활용한 악곡으로 상실의 정서를 표현하고, 이에 대한 치유와 회복으로 듣는 이들을 이끌며 격정적인 무대 퍼포먼스로 몰입의 순간을 선사한다. 2022년 한국과 일본에서 첫 정규앨범 4pricøt을 발매하며 국내 4개, 일본 5개 도시 투어 공연을 진행했다. 2023년에는 새로운 싱글 ‘쪽빛물색’ 발매와 함께 한국/일본 투어를 앞두고 있으며, 가을에는 영국에서 열리는 “Burn It Down Festival”을 비롯해 투어를 떠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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