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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Jul 05. 2020

초밥 참기

초밥은 참아도 사랑은 참지 말자  

초밥이 먹고 싶었다. 제일 먼저 먹고 싶은 건 역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연어초밥 아니면 달콤하면서도 폭신한 계란초밥. 그다음으로는 순백의 와사비폭탄 알싸한 광어초밥, 그다음으로는 짭짤하면서 고소한, 베어 물기만 해도 기운이 솟는 장어초밥.. 더위를 견디는 것만으로 번잡스러운 여름에는 초밥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먹을 수 없다. 참아야 한다. 이게 다 뚱뚱한 호랑이에 빠진 탓이다. 그 뚱뚱한 호랑이와는 인스타에서 처음 만났다. 귀여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는 인스타 광고에 자주 현혹되는 편이고, 그날도 평소처럼 광고의 바다에서 신명나게 헤엄치던 중에 뚱뚱한 호랑이, 일명 ‘뚱랑이’를 만난 것이다. 뚱랑이의 첫인상은 평소 좋아하는 무민, 도날드덕, 스누피, 토이스토리 친구들처럼 치명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왠지.. 자꾸 생각났다. 사람인 척 아.아도 마시고 비 오는 날엔 우산을 쓰고, 누워서 폰 하느라 볼이 뭉개진 뚱랑이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씹덕스러웠다.

제일 좋아하는 눌린 볼 뚱랑이ㅠ 쏘 큣

호기심에 눌러본 뚱랑이 홈페이지에는 나를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엄청난 라인업. 뚱랑이 마스크, 뚱랑이 폰케이스, 뚱랑이 스티커, 뚱랑이 노트... 그냥 온 세상이 다 뚱랑이었다. 문제는 종류가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매일같이 부지런히 뚱랑이 굿즈를 정주행 하며 케이스를 골랐지만 나 같은 박애주의자가 뚱랑이 딱 하나만 고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밤늦게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파김치가 되어 잠들던 나날들. 뚱랑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딱 한 마리의 뚱랑이를 고르는 데 실패한 나는 그 과정이 너무 지치고 괴로워서 억지로 뚱랑이를 잊기로 결심했다. 그래. 호랑이가 귀여우면 얼마나 귀엽다고. 잊자 잊어. 헤어진 애인도 잊었는데 사귀지도 않은 호랑이 못 잊을 게 뭐야. 다 잊자 잊어. 그렇게 나는 뚱랑이를 잊어가는 듯했다.


담았다 하면 기본이 5개...


캐릭터 박애주의자인 나는 그 뒤로도 문란한 캐릭터 생활을 즐겼다. 빵집에서는 무민 보냉백을 사는 한편, 서점에서는 스누피 선풍기를 위해 5만 원이나 책을 사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던 어느 날, 뚱랑이는 예상치 못한 순간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우연찮게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릴 일이 있었다는 회사 언니가 뚱랑이 스티커를 선물해온 것이었다. 뚱랑이 형이 왜 여기서 나와...? 스마트폰 화면에서 구경하던 뚱랑이와 달리 현실 세상의 뚱랑이는 너무나 고퀄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기쁘고 즐거웠다. 옛말에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하였나. 애써 뚱랑이를 잊으려던 나의 마음은 스티커를 받은 후로 마른 장작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마음을 참지 못한 채 뚱랑이를 사러 영등포 교보문고에 달려갔는데 글쎄 폰케이스가 4개밖에 없었다. 다양한 뚱랑이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스티커를 사서 투명케이스로 꾸며봤지만 영 성에 차지 않았다. 슬픈 마음에 뚱랑이 회사에도 문의해봤지만 공간 문제로 모든 상품을 진열하기는 어렵다는 말만 돌아왔다.


뚱랑이 스티커+뚱랑이 그립톡=뚱랑이 아이폰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나. 짬뽕밥 한 술에 찹쌀 탕수육 한 점을 조화롭게 먹던 평화로운 점심시간, 친구가 의문의 사진 2장을 보내왔다. 그건 놀랍게도 뚱랑이었다. 글쎄 뚱랑이 팝업스토어가 열렸다고 했다. 이럴 수가. 심지어 거긴 교보문고보다 회사에서 더 가까운 백화점이었다. 무려 몇 주 전부터 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당장 내일까지밖에 안 한다고. 그 좋아하는 탕수육도 마다하고 사진 속 뚱랑이들을 빠르게 스캔했다. 세상에. 적어도 10개는 넘는 폰케이스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짬뽕 국물을 원샷하고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손님의 등장에 직원은 조금 놀란 듯했다. 몇 주 동안 뚱랑이 굿즈를 너무 오랫동안 고민한 나머지, 나는 직원 같은 손님이 되어있었다. 자연스럽게 같이 간 회사 언니에게 이 그립톡은 색상이 세 가지인데 흰색이 깔끔하지만 주황색이 가장 호랑이스러운 거 같다며 묻지도 않은 설명을 해댔다. 이 폰케이스는 똑같은 패턴의 그립톡이 있는데 그냥 동그란 모양이라서 덜 끌린다, 이 스티커는 리무버블이라 뗐다 붙였다 하기 좋다 등등..

어떻게 이런 일이.. 뚱랑이 형... 거기서 3주나 팝업했다니...

유난스럽게 뚱랑이를 고르는데, 다른 손님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만 뚱랑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뿌듯하기까지 했는데 알고 보니 또 다른 손님은 바로 나한테 사진을 보내준 친구였다. 손님들끼리 다 아는 사이라는 게 밝혀지자 슬슬 직원이 우리를 뜨악스러워할 것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뚱랑이를 포기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나는 열심히 뚱랑이 이상형 월드컵을 시작했다. 혹시 기종에 맞는 케이스 재고가 없으면 어떡하냐는 나의 다급한 물음에 직원은 내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일단 디자인만 골라주시면 재고를 꼭 찾아보겠다고 했다. 사실 내가 걱정되는 건 재고가 없는 게 아니라 이미 폰을 뚱랑이 스티커와 투명케이스로 꾸민 전력이 있는데 모른 척 뚱랑이 폰케이스를 고르고 있는 한심한 나 자신이었다. 이번 달은 이미 귀여운 것들을 많이 사서 돈도 없는데.. 그치만 뚱랑이는 내일이면 내 눈 앞을 떠나고 기회는 단 이틀뿐.


그리하여 나는 초밥을 참게 된 것이다. 나는 기름지고, 담백하고, 달달하고, 고소하고, 기운 나는 초밥을 좋아하긴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초밥을 참을 수 있지만 뚱랑이는 참을 수 없다. 뚱랑이 앞에서 정신을 잃은 나를 보고 회사 언니가 날 한심하게 여길까봐 언니를 붙잡고 호소했다. 언니. 나 오늘 초밥 배달 참을게. 초밥 먹을 돈으로 뚱랑이 살게. 혼자만 절절한 뚱랑이와의 사랑. 한 번도 뚱랑이를 말린 적 없는 언니는 황당해하며 그래 그래 얼른 사라며 나를 부추겨줬다. 자금도 확보됐고 주변의 동의도 구했고(?)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어떤 그림을 고를까. 아무래도 하늘색이 제일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세상에? 이 뚱랑이는 우산을 들고 장화까지 신고 있네? 언니. 나 이거 살게. 내일부터 장마잖아. 장마 땐 장화신은 뚱랑이 케이스 정도는 끼워줘야 하잖아. 언니는 지쳤는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나저나 살면서 장마가 반가웠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마철에 딱 맞는 장화뚱랑이 케이스. 호국보훈 뚱랑이도 씹덕씹덕

결국 나는 장마대비 케이스와 8.15 광복절 주간에 쓸 호국보훈 뚱랑이 스티커, 그냥 귀여워서 산 뚱랑이 노트를 품에 안고 겨우 점심시간을 마쳤다. 나의 유난스러운 뚱랑이 사랑을 말없이 지켜만 보던 팝업스토어 직원은 백화점 5% 쿠폰을 추천해줬다. 덕분에 콜라 값도 아낄 수 있었다. 정말 이 팝업이 내일 까지냐는 물음에 직원은 그렇다고 했고 나는 그날 밤 뚱랑이를 고르느라 잠을 설쳤다. 뚱랑이 팝업 마지막 날.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관심 없다던 뚱랑이 에어팟 케이스와 키링을 샀고 어제 본 그 직원의 시선이 괜히 따갑게 느껴져 식은땀을 흘렸다. 그날도 초밥은 참았다. 미래의 초밥을 가불해서 뚱랑이를 산 나에게 초밥은 당분간 없는 음식일 뿐이다.

뚱랑이 팝업 마지막날. 관심 없던 에어팟 케이스 고르느라 밤샘.

오늘은 초밥을 참는 대신 떡볶이를 시켜먹었다. 나는 초밥은 좋아하지만 떡볶이는 사랑한다. 그리고 다시 다짐했다. 초밥은 참아도 사랑은 참지 말자. 애써 숨기지 말자. 마음껏 사랑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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