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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Jul 12. 2020

싫은 손님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싫은 손님이었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라는 책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아니. 싫은 걸 이렇게 대놓고 싫다고 표현해도 되는 건가!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왠지 모를 호기심에 책을 샀고 당연히 재미있었다. '너무' 싫은 사람이 아닌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라는 미묘한 어감이 좋았다. 살면서 싫어하게 된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는 경계선에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고객을 싫어하는 것은 매달 성실히 봉급을 주는 회사의 대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웬만하면 싫어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노력한다는 건 잘 안 된다는 뜻이다. 고객 보기를 보석같이 하려던 내 마음과는 다르게 싫은 손님들은 자꾸만 늘어났다.

여행상품을 판매하는 일을 할 때 겪은 사람들 중에 처음으로 싫은 마음을 가졌던 손님은 나에게 문자를 잘못 보낸 손님이다. 전화로 상담을 하다가 여행상품 일정을 문자로 보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열심히 정리해서 보냈는데 "어떤 것 같아요? 난 별로인 것 같은데." 하는 답장이 온 것이다. 당시에는 친구들에게 보낼 문자를 잘못 보냈나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한동안 잠들기 전에 그 문자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것 같아요? 별로인 것 같은데.
어떤 것 같아요? 별로인 것 같은데.
어떤 것 같아요? 별로인 것 같은데.  

별로.. 별로? 아니! 별로면 왜 보내달라고 하셨어요! 하고 싶었지만 별로인지 모르니까 보내달라고 하셨겠지, 근데 보니까 별로였겠지 하고 나를 다잡으며 긴긴밤을 보냈다. 그 상품이 어떤 상품이었는지, 별로인 상품이었는지 아닌 상품이었는지는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문자를 보낼 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손님 때문에 집에서도 회사 생각을 하게 된 게 억울해서 삼사일 정도 그 손님을 진심으로 싫어하고 말았다.

그다음으로 싫은 손님은 취소 수수료 설명을 안 들으려는 손님. 이런 사람들은 상품 일정이나 가격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듣지만 취소 약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려고 하면 아이 나는 절대 취소할 일 없어~~ 하면서 됐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취소할 일 없는 사람한테만 취소할 일이 벌어졌던 해괴망측한 과거를 떠올리며 나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번만 들어달라며 읍소를 하고, 문자로도 보낸다. 가끔씩 취소할 일이 없는 사람이 취소할 일이 생기면, 취소 약관을 안내받은 적 없다며 전액 환불을 요구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손님들도 손님들이지만, 자신이 언제부터 우리 회사를 이용했는지 자랑하는 손님이나 회사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손님도 (사실은) 싫다. 싫다기보다는 어렵고 부담스럽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특히 간혹 가다 등장하는 일부 덕후 손님은 싫다는 말을 넘어서 곤란할 정도다. 일부 덕후 손님이란, 애정을 빌미로 회사 물품을 공짜로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인데 어쨌거나 그들의 마음속엔 사랑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응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사실 일을 하면서 겪는 대부분의 손님은 좋지도 싫지도 않은 편에 속하지만 그 와중에도 싫은 손님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 호르몬의 영향인지 무더운 날씨 탓인지 며칠 동안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예전 같았으면 동네 친구랑 막걸리에 모둠전을 때리고도 남았을 기분이었다. 하지만 전통주점이라고 해서 코로나 시대에 예외는 아니기에 미용실에 갔다. 미용실에 가는 날은 플렉스 데이다. 미리 결제해둔 과거의 부지런한 나 덕분에 미용실에서는 추가 지출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미용실만 가면 나는 묘하게 절약한 기분으로 근처 옷가게인 나무그림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거짓말이다.

그냥 옷 사는 걸 좋아한다.

코로나 때문인지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겨울에도 많이 사는 편이지만 나무그림은 여름옷이 특히 예쁘다. 그리고 겨울 옷보다는 여름옷이 단가가 저렴하기 때문에 더 흥청망청거리기 좋다. 오랜만에 온 손님이었는지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입어보셔도 된다고 옆에서 성화가 가득했다. 심지어 흰색 옷도 가능하다며 어필해온다. 한껏 적극적인 나무그림 언니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매장 한 바퀴를 훑었다. 그리고는 찜해둔 옷을 들고 본격적으로 아랑곳하기 시작했다.

"언니 이거 입어봐도 돼여?"

갑자기 시작된 아랑곳에 언니는 삼고초려 끝에 제갈량을 만난 유비라도 된 것처럼 뛸 듯이 기뻐했다.

블라우스는 입어보니 영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내 표정을 본 나무그림 언니가 혹시 찾으시는 상품은 없냔다. 없을리가요.. 나무그림 언니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속 위시리스트는 하루에도 열두 개씩 생겨난다. 일편단심이라곤 모르는 누구보다 문란한 쇼핑러가 바로 나다. 그중 가장 찾는 건 플레어스커트. 나무그림 언니는 역시 프로답게 치마 5개 정도를 보여준다. 제일 무난한 남색 치마를 입어보는데 탈의실 밖에서 언니가 애타게 외친다. 고객님 버클을 먼저 푸르고 지퍼를 잠그셔야 잘 올라가세요~~!! 언니의 응원에 왈칵 눈물이 날 뻔했지만 양천구에서 소문난 똥손이어서인지 버클을 잠그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치마는 너무 예뻤다. 치마 소재를 물어봐도 나무그림 언니는 싫은 내색 한 번이 없었고 소재가 면 혼방이라 더 좋았다. 문제는 이 치마를 뭐랑 입냐는 거였는데 계속되는 추천 지옥 속에서도 나무그림 언니는 지치지 않고 한 베이지색 블라우스를 추천해줬다. 그리고 나는 그 블라우스를 보자마자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바로 우리 집에 있는 블라우스였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그냥 딴 걸 고르면서 말을 돌렸을 텐데 오늘따라 마음에 드는 치마를 골라준 언니가 너무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아는 척을 하고 말았다.

"아 이 블라우스여? 집에 있어여! 작년에 샀는데! 흰 색도 있고 연보라 색도 요번에 나왔던데 너무 이쁘져.. 근데 블라우슨데.. 가격은 치마만 해서.. 그럴 바에 이 치마 사니까~~ (치마를 흔들며) 여기서 옷을 너무 많이 사가지구여.. 사실 오늘 입은 바지도 여기서 산 건데^^~"

한참 신나서 얘기하다 보니 언니 표정을 못 봤는데 언니는 예상치 못한 뜨악스러운 손님의 대답에 열심히 리액션을 쥐어짜 내는 중이었다.

"아.. 이 옷 이미 있으시구나.."

"아.. 이 바지.. 뭔지 알 것 같아요~~"

어쩐지 팔 수 있는 물건의 범위가 줄어든 언니는 최선을 다해서 내가 사지 않았을 법한 옷 중에서 추천을 했다. 그러나 내적 친분이 강하게 쌓여버린 나는 언니가 추천한 옷은 보지 않고 내가 이미 산 옷들을 어루만지면서 또 실수를 하고 마는데...

"이 블라우스도 흰색 검은색 베이지색 나오잖아요~~ 작년에 검은색 빼고 사서 진짜 잘 입었는데.."
"맞아요.."

언젠가부터 나무그림 언니는 손님이 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뿔싸. 순간 나는 나의 과오를 깨닫고 계산을 서둘렀다. 계산할 때쯤 되면 꼭 해줘야 하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건, "언니 이거 새거있어여?" 이 말을 한다는 건 거의 산다는 뜻이다. 나의 경우 새 거가 있든 없든 산다는 뜻이지만 이왕이면 새 거를 사겠다는 뜻이다. 언니는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치마는 디피된 상품이 다라며 원한다면 주문을 넣어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오프라인에서 옷을 살 때, 내일 입는 옵션은 있지만 내일모레 입는 옵션은 없다. 바로 입을 거니까 사는 거 아닌가요! 결제는 오늘도 일하고 내일도 일하고 다음 달에도 일할 거니까 현명하게 2개월 할부로 했다. 나무그림 언니는 회원 적립을 해주면서 내 이름이 자기랑 같다며 끝까지 우리 둘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집에 오면서 이름이 같은 그 직원에게 나는 싫은 손님이었을까, 고민해봤다. 내가 옷 가게 직원이라면... 입어보기만 하고 안 사는 손님은 싫은 손님, 소재 물어보는 손님은 싫은 손님, 회사랑 내적 친밀감을 과시하는 손님은 싫은 손님, 직원 앞에서 아는 척하는 손님은 싫은 손님. 그치만 10만 원 이상 결제하는 손님은 싫지많은 않은 손님. 그래. 나는 싫지만은 않은 손님이다. 그 정도면 됐다. 그치만 나무그림 그녀는 좋지만은 않은 직원이 아니라, 완전 좋은 직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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