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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Dec 15. 2018

77년생 내 친구 이야기

회사에서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


1.

그녀와 나는 2015년 10월에 만났다. 어색한 인사를 뒤로 하고 다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그녀는 어젯밤 배탈이 나서 아래 위로 연신 쏟아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녀의 전임자는 알탕을 좋아해서 우리는 알탕이란 두글자만으로 함께 행복해할 수 있었는데 어쩐지 그녀의 취향은 알 수가 없어 아쉬웠다. 누구보다 밥을 잘 먹을 것 같은 인상으로 그녀는 밥을 반이나 남겼다.


2.

그녀는 분명 새 식구였지만 우리는 왠지 고요했다. 발령은 갑작스러웠고,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전임자와 전전임자는 모두 급하게 사무실을 떠났다. 사람들은 속으로 이제 누가 오든 아무래도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어렵게 마련한 환영회 자리에서 그녀는 너도 그 언니 떠나서 아쉽지? 라는 말로 정곡을 찔렀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3.

너 그거 알아? 우리는 77클럽이야. 그러고보니 우리 부서에는 77년생이 4명이나 있었다. 같은 팀엔 2명. 우리 팀은 총 4명. 나와 팀장님을 제외하고 그녀와 또 다른 팀원은 모두 77이었다.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게 제일 싫은 나는 13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나도 77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77클럽 회원들은 인생의 지혜를 나에게 많이 나눠주었다. 가끔은 대충해도 위에서는 잘 모른다는 것, 사회에선 사람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된다는 것, 고객이 면전에 대고 욕을 하면 똑같이 되물으라는 것 등등. 어머. 고객님 뭐라구요? 씨발년이라구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역시 그 말을 한 것은 77클럽 멤버중에서도 그녀였다.


4.

그녀는 콜라를 좋아했다. 게다가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음식 모자라는 것을 끔찍히 싫어했다. 엽떡엔 무조건 1인 1쿨피스. 단무지는 2인 1단무지. 편의점에 가면 신상 젤리는 무조건 먹어봐야 직성이 풀렸고, 아침부터 식빵 한 줄을 구워 잼을 발라 우리 모두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어느날은 새벽같이 군고구마를 구워 출근했다. 그녀가 주는 고구마는 하나같이 꿀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생각하는 77년생 같으면서도 안 같은 그녀에게 묘하게 빠져들었다. 그녀는 나를 사육했고 나는 함께 지내던 삼 년동안 10kg가 쪘다. 운명적이게도 그녀의 제복 사이즈는 77이었다.


5.

직급과 업무 숙련도가 반비례하는 우리 회사에서 그녀는 잔뼈가 굵은 과장이었다. 오랜 현장 경험으로 이제는 관상도 본다는 그녀는 모르는 게 없었다. 나는 무슨 문제가 생기면 과장님. 하고 부르기부터 했고 그 중 반절은 과장님이 대답하기 전에 해결되곤 했다. 후배에게 책임을 미루고, 귀찮으니 네가 좀 알아봐달라는 것이 당연한 이 공간에서 그녀는 확실히 뭔가 좀 다른 사람이었다. 새로운 지시사항이 내려오거나 규정이 바뀔 때마다 이건 무슨 뜻이냐 고 묻던 그녀는 정말 몰라서 물은 것만은 아니었다.


6.

고객이 화가 잔뜩 났다. 내가 중요한 안내사항을 빠뜨렸기 때문이었다. 사과해도 고객의 화가 풀릴 리가 없었다. 고객은 원하는 일정이 있었고, 실제 예약한 여행상품에는 그 일정이 빠져있었다. 당장 내일이 출발이었고 고객은 이 일정으로는 여행할 수 없다며 전액환불을 요구했다.


이미 퇴근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이라 지체없이 전액환불 절차를 알아봐야 하는데 전화를 끊자마자 눈물이 뚝하고 떨어졌다. 상처주는 말만 골라하는 고객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런 말을 마음놓고 할 수 있게 실수해버린 내 자신이 싫어서. 괜한 자존심에 몰래 훌쩍대는 나를 몇 분 모른 척 해주던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니 탓이 아니야. 울지마. 울면 힘들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잘못같은데 그런데 그 말 한 마디가 내 맘을 무너뜨린다. 눈물이 펑펑 난다. 그녀는 말없이 휴지를 뽑아 건넨다. 이젠 그냥 울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 한다. 그 때 알았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생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소심하고 자신감없고 목소리마저 작은 내가 마케팅이니 영업이니 하는 것을 한답시고 흉내낼 때마다 그녀는 너 참 잘한다 요샌 물이 올랐다 해주었다.


7.

칭찬은 고래는 춤추게 하지만 사람의 마음도 움직인다. 가끔은 착각에 빠지게도 만든다. 그녀는 내 실제 능력보다 훨씬 많이 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주었고, 나는 어느새 해볼만 하다는 생각을 한다. 77년생 나의 친구는 아무도 믿으면 안된다는 냉정한 사회에서 처음으로 나를 믿어준 사람이다. 그녀를 만나고나서 나는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라는 자신없는 물음보다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8.

그녀와 나는 2018년 3월에 헤어졌다. 그녀가 처음 왔을 때가 떠오르는 하루였다. 갑작스런 발령이었고, 나는 팀에서 업무를 바꿔 그녀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 맥심 카누 라떼 2개에 설탕 1포. 얼음은 많이. 엽떡 B세트에 치즈와 햄사리 추가. 쿨피스랑 단무지는 2개. 콜라는 무조건 코카콜라. 편의점 얼음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한명숙 피자는 스파이시 쉬림프피자와 고구마 피자 골드크러스트 반반으로. 그녀와의 공식은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포옹을 하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잘할 거야. 내가 없어도.

너는 충분히 잘 하고 있어. 내가 알아.


온갖 농담을 하며 눈물을 다스리고 그녀와 헤어졌다.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돌연 눈물이 났다. 부끄러워 눈을 좌우로 여러 번 굴렸다. 집에 와서 변기에 앉았는데 또 눈물이 났다. 눈을 깜빡이면서 진정될 때까지 똥을 싸는 척 했다. 전남친도 아닌 전동료와의 이별은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다.


9.

혹독한 사회에서 가장 처음으로 너는 잘할 거라 믿어줌으로써 나를 격려해준 사람. 실수해도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준 사람. 회사에서 바보처럼 눈물을 펑펑 흘려도 나무라지 않은 사람. 나의 77년생 친구는 이런 사람이다. 13살의 나이차이는 중요치 않다. 우리는 엽떡을 좋아하고, 코카콜라를 즐기며, 캐릭터라면 사족을 못 쓰고, 카톡 이모티콘을 한 달에 한 개는 꼭 사는 점이 똑같으니까.


10.

그녀는 내일 승진시험을 치른다. 나는 알고있다. 분명 남을 챙긴답시고 본인 공부에 소홀했을 것을. 그래도 가슴 깊이 응원한다. 마킹이 밀린다거나, 급똥이 오는 불행이 오지않도록. 공부한 데서만 출제되고, 찍은 것은 다 맞는 행운만이 찾아오도록. 이제 나는 붙으면 합격주, 떨어지면 위로주를 함께 먹을 준비만 하면 된다.


11.

어제는 몹시 애정하던 글쓰기 수업이 끝나는 날이었다. 마지막이라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면서도 고마운 존재라 사람들을 결속하게 만든다. 나이도 회사도 사는 곳도 모르지만 서로의 문체만은 확실히 아는 그  곳. 두 아이의 아빠이자 분리수거를 좋아한다는 옆자리 영화 마케터님과 일을 꾸몄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올출석 멤버이기에. 어쩐지 작당모의하는 수뇌부 회장, 부회장의 모양새로 적당히 유난을 떨어댄 결과, 뒤풀이에 10명이나 함께 하는 혁혁한 성과를 이뤄냈다.


12주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나이를 밝히는 참 이상한 모임. 갑작스런 나이 오픈에 주저하던 회장님은 아 저는 사실 77이에요 마흔 두 살. 한다. 어라 77? 나도 77년생 친구 있는데. 그리고 내가 아는 77클럽은 다 좋은 사람인데. 이번에도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글쓰기에도 좋은 기운이 흘러 넘친다.


아무리 생각해도 77년생과 90년생은 친구하기 딱 좋은 나이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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