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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Dec 24. 2018

지금, 글쓰는 이유

글을 쓴다는 건 영혼을 채워나가는 것


1.
유치원에서 나는 늘 혼자였다. 이유는 믿을 수 없겠지만 너무 부끄러워서. 나는 단지 그 이유로 5살 친구들 중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걸 수 없었다. 친구를 사귀려면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늘 누군가 말을 걸어오길 기다렸지만, 생각보다 유치원 사회는 냉혹했다. 결국 나는 말 한마디 못 해본 채 이렇다 할 친구 한 명 없이 유년기를 마무리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다행히 짝꿍이 말을 걸어와 친구가 딱 한 명 생겼다. 숫기 없는 나와 친해지려는 아이들은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집에만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수다쟁이가 됐다. 학교 앞에서 삐약대는 병아리를 본 것, 시조를 거침없이 외워대서 선생님을 놀라게 한 일, 급식이 너무 맛이 없어 짝꿍이 대신 먹어줬다는 몹시 사소한 얘기까지 다 털어놓았다.

타고난 울렁증으로 발표만 시키면 숨이 가빠오고 얼굴이 홍당무가 됐던 나는 다행히도 일기는 열심히 썼다. 앞에서 말은 잘 못해도 뒤에선 일기에는 모든 것을 기록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내 일기가 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어 학교 복도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한겨울의 긴긴밤을 보낼 방법 중 하나로 엄마는 햇밤을 선택했고, 그 일기는 밤의 고소함과 맛있는 밤을 고르는 방법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글쓰기의 매력을 알게 된 것이.


2.
굳이 말로 하기엔 쑥스럽고, 안 하자니 맘에 걸리는 것들을 글로 썼다. 친구들끼리 쓰는 자물쇠 달린 비밀 일기장이나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싸이월드의 공유 다이어리를 나는 참 좋아했다. 다시 읽어보면 항상 나 혼자 떠들긴 했지만. 하지만 어떤 주제가 있는 글은 쓰기가 어려웠다. 인문학부로 대학에 입학한 나는 영어나 프랑스어보다 한국어를 더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국문과를 선택했다

그 당시의 나는 책도 전혀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단지 한국어밖에 못한다는 이유로 국문과에 온 게 찔려서 기가 죽었다. 다들 좋아하는 작가나 문장 정도는 당연히 있었고 소설 분석도 척척 해냈다. 국문과는 내게 굴레가 되었다. 국문과가 이것도 모르냐는 말을 들을까 봐 웬만하면 학과를 드러내지 않았다.


과제는 늘 힘들었다. 거창한 마음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도 대단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중압감에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늘 미루기 일쑤였고 기한이 임박해서야 마음같지 않은 글을 대충 써서 냈다. 그나마 기한에 맞췄다는 점만이 유일하게 마음같은 일이었다.

대학생활 대부분을 뭉그적 거리며 보내다가 나는 글쓰기로 점철된 일 년을 맞이하게 된다. 방년 스물셋. 휴학과 연애의 아름다운 콜라보레이션으로 내 인생은 행복만을 달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물넷에 대학병원에서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 첫 외출이었던 당시 남자친구와의 기념일에 무참히 차였다. 제일 좋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서로 선물교환까지 마친 상태였다.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이란 감정이 이렇게나 지키기 어려운 감정이라는 것을, 사랑은 여리고 연약하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분해서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는 생각으로 여러 날을 지샜다. 지하철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고, 괜찮아진 것 같아 누구라도 만나서 실컷 웃고 떠든 후 집에 돌아와 자려고 불을 끄면 너무 슬프고 외로워서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글을 썼다. 이글루라는 플랫폼에 나만 아는 블로그를 만들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날 것의 마음들을 쏟아내고 또 쏟아냈다.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로 하루 사이에 내 마음이 고작 찌질한 미련 정도로 치부되는 것이 억울했고, 그 와중에 수술 부위가 쑤셔올 때마다 나는 너무 서글퍼졌다. 주변에선 종양도 미리 발견했고 수술마저 잘 되었으니 천만다행인 거 아니냐고, 그리고 이제 그 남자는 그만 잊으라는 말을 쉽게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마음을 무 자르듯 자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한 번도 마음을 잘라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잘라낸 마음을 붙이면 모를까.

내가 왜 슬프고 불안한지를 알아내서 기록하고 싶었고, 그래야만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아프고 힘든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매일같이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는데 교실에 도둑이 들어 종례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눈을 감고 도둑이 자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며 몇 달을 보냈다. 내 이글루는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 곳이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기에 쓸 수 있었다. 그 곳엔 오직 나만 있었다.  

지나고 나서 세어보니 일 년 365일 중 365번 이상 글을 썼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것은 누가 시켜서도, 점수를 받기 위해서도, 상을 타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나는 어디에라도 털어놓고 싶었고, 그나마 글을 쓰면 갈 곳 없는 마음의 찌꺼기들을 덜어 낼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고작 사랑 때문에 난생처음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바보같은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래도 글을 쓰다 보면 가끔은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3.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는 오랫동안 일기 외의 글을 쓰지 않았다. 그 좋아하던 이글루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나름 인턴까지 하며 어렵게 들어간 회사였고, 이 곳에 적응해야겠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어떤 상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 업무가 커피 타기, 삼각김밥 데워오기, 우쭈쭈해주기. 자기 빨래 세탁소에 맡기기라고 생각하는 부장을 만난 지 6개월 만에 우울증이 왔다. 약을 복용하는 시기에는 역시 글을 쓰지 못했다. 항우울제는 먹고 나면 바로 잠이 오고, 그대로 하루를 흘려보내게 하는 무서운 약이었다. 그렇게 첫 발령지에서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려보냈고 부서를 옮긴 후에야 나는 비로소 다시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올해 여름, 부천의 작은 책방인 오키로북스에서 하는 에세이 수업을 큰 맘먹고 등록했다. 4년 동안 나는 퇴근 후엔 무기력하게 누워있기만 했다. 남들은 여기저기 잘도 다니던데 나에겐 회사에 들어가고 처음 해보는 취미생활이었다. 스물넷에 글쓰기를 시작했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스물넷의 나와 스물아홉의 나는 달랐다. 내 이글루엔 독자가 없었지만, 에세이 수업에는 다른 수강생이 있었다. 신경이 쓰였다. 회사 이름도, 상사에게 상처 받은 일도 자세히 쓰기 어려웠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회사에 대해 오해하거나, 나에 대해 오해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어딘가에 발표할 글도 아니면서 그 부장이 보면 어떡하지란 생각도 들었다. 쓰다 보니 예전 생각이 떠올라 괴롭고 힘들어 숨이 막히기도 했다. 이리저리 민감한 부분을 잘라내고 뭉뚱그려 글을 완성하긴 했는데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무색무취의 글이 되어버렸다. 내가 봐도 너무 맹숭맹숭해서 다시는 펴보고 싶지 않은 글이었다. 그러는 중에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나와는 너무 다른 수강생들의 글이었다. 그들은 놀랍도록 솔직했고, 솔직한 글에는 남다른 힘이 있었다.  나는 나이도, 직업도 모르는 그들 덕분에 용기를 내어 더 솔직해질 수 있었다.

4주간의 수업이 종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부장에 대한 글을 완성했다. 꼭 써야만 할 것 같은 글이었다. 글쓰기 수업이 끝났으니 꼭 써야 하는 숙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글로 써야겠단 열망에 사로잡혔다. 회사 당직실에서 몰래몰래 쓰다 퇴근해서 집에서 완성했다. 그렇게 다시 "자발적인"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운좋게 브런치 작가도 되었다. 브런치 작가가 너무 되고 싶어서 작가 심사에 평생 비밀이라던 내 이글루를 첨부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나의 조각난 마음들이 등단에(?)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나는 브런치팀의 심사기준은 잘 모르지만 일단 답답해서 쓰다보면, 그렇게 써놓으면 뭐라도 되기는 된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4.

나의 글쓰기는 세상에 대한 혼자만의 고백이자 아픈 마음을 털어놓는 출구이고, 상처를 치유받는 수단이다. 글을 통해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다. 평소의 나는 슈퍼 *관종이자 원체가 가벼운 인간이라 웃음 욕심 또한 많아서 웃음 위주의 가벼운 글만 1년에 한두 번 썼었다. 마음이 힘들어지면서 글을 쓰는 주기도 점점 길어졌는데 해묵은 마음을 덜어내고 나니 다시 가벼운 글도 술술 쓸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웃기려고 작정하고 글을 쓰면 그 와중에 취향이 통하는 몇몇 사람들이 깔깔대곤 하는데 나는 그 웃음에 큰 힘을 얻는다. 신기한 일이다. 돈 한 푼 들지 않는 글쓰기가 이렇게 삶에 큰 힘이 되다니.


*관종 : 관심 종자.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회사 일로, 인간관계로 힘들 때면 소맥을 그렇게 말아먹었다. 심지어 언제 술이 당길지 모른다는 이유로 소맥을 잘 섞어주는 도구이자 회식 자리 잇템인 소맥 탕탕이를 가방에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다. 거의 일주일에 서너 번은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제는 소맥을 말지 않는다. 술을 먹지 않아도 행복하다. 글쓰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영혼을 채워나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태어나자마자 부여받은 엄마아빠의 딸이라는 영혼. 초-중-고-대학생을 거쳐 완성한 회사원이라는 직업적인 영혼.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했던 마음들의 영혼 외에 나 혼자 오롯이 마련한 글을 쓰는 나의 영혼! 이제 나는 엄마 아빠랑 싸워도, 회사에서 실수해도, 사랑에 실패해도 글을 쓰는 내가 있기 때문에 몇 글자 끄적이며 버텨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글을 쓰면 분명히 나타난다. 나같은 사람들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위로는 살아가는 데 꽤 큰 도움이 된다.


나는 글이든 말이든 아무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을 좋아한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해서 아무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써나갈 것이다. 텅 빈 운동장에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그러다 보면 누군가 와서 말을 걸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초등학교 때 처음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던 그 아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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