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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Oct 05. 2018

끝까지 알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하여

경조비와 마음


가까운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다. 몇 번의 연애에서 겪은 이별이 나에겐 상실의 전부일 뿐. 심지어 강아지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말하게 될 때는 늘 조심스러워진다. 겪어 보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햇수로 따지면 어엿한 직장 5년차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같은 부서 동료의 부고를 들을 때 정도? 그런데 요즘은 꽤 자주 조심스러워진다.

바로 회사의 경조비 제도 때문이다. 나는 경조비 승인 담당자는 아니지만, 두 달 전부터 경조비 신청에 필요한 가족 데이터를 관리하고 있다.

우리 회사에서는, 경조비 신청을 하기 전에 해당하는 가족 데이터가 내부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지 않다면 가족 데이터부터 먼저 신청해야 한다. 그리고 회사에서 정의하는 경조사는 부모님의 환갑 또는 회갑, 직계 가족의 사망 등이다.

부모님의 환갑 또는 회갑 등 경사를 맞이하는 직원들은 대개 젊은 편이고, 인터넷 신청에 익숙하기 때문에 전화 문의가 많지 않다. 그러나, 조사의 경우는 다르다. 조사를 겪는 직원들은 다소 평균 연령이 높고, 인터넷 신청에 익숙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게 경조비로 문의 전화를 하는 사람들은 보통 최근 몇 달 사이에 직계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인 것이다.

나는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어떻게 대해야 할 지 항상 고민이 된다. 일단은 조심스러워진다. 너무 슬퍼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너무 딱딱해서도 안 될 것 같다. 가끔 내가 너무 어쩔 줄 모를 때는 오히려 상대방이 더 담담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기운이 없다. 당연한 거 겠지만.

옆자리 동료인 J는 가끔 경조비 지급 제도에 의문이 든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조비니 가족 데이터니 하는 것들을 승인받으려면 해당하는 가족과 나의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가족관계증명서와, 사망일을 확인할 수 있는 사망진단서 등의 여러가지 서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애인과 헤어지기만 해도 괴롭고 슬프고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인데 개중 다행인 점은 이별을 증명하는 서류는 발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경조비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가족이 사망했다는 서류를 떼서 스캔까지 해서 올려야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서류로 굳이 확인하는 기분은 어떨까.

더 잔인한 것은, 경조비는 사유 발생일로부터 1년 내에만 지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실념해서 1년하고 1일이 지났다고 하면 경조비를 받을 수 없다. 나는 이별을 온전히 슬퍼하는 데에만 연애 기간의 2배 이상을 쏟아붓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가족이 내 곁을 영원히 떠났는데 1년 이내에 경조비를 신청해야 하는 운명이라면. 그리고 그걸 서둘러 챙겨야 한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삶이 이럴 땐 너무 얄궂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경조비를 신청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슬픔보다는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마치 제출 기한이 코 앞으로 다가온 숙제를 하듯이. 그리고 혹시라도 잊지 않기 위해서. 1년이라는 시간은 때로는 길지만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는 너무 짧은 시간일 수도 있기 때문에.




퇴근 시간을 한 시간 앞두고 걸려 온 전화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는, 자녀가 사망해서 경조비를 신청하려 한다고 했다. 나는 벌써부터 말문이 막혔지만 수화기 속 그녀는 오히려 차분했다. 시스템적인 문제로 경조비를 신청하려면 해당하는 자녀의 데이터를 삭제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설명했다.

말하고 나니 삭제라는 어휘가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순순히 내가 일러준 대로 삭제신청을 하고 다시 전화를 걸어와 제대로 한 게 맞는지 확인해달라고 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라, 확인 차원에서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삭제처리가 완료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모두 조심스러웠다.

회사 내부 시스템에서는 삭제신청해서 승인된 가족의 이름은 더 이상 가족사항에서 조회되지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사망했더라도 삭제신청하지 않은 가족은 계속해서 시스템에서 가족으로 조회가 가능하다.

슬프게도 그녀의 아버지는 일 년 전에 사망했고, 하필 시스템 충돌이 없었고, 두 달 전에 사망한 아이의 삭제승인 여부를 확인하는 그 순간에도 버젓이 조회되고 있었다. 내내 감정을 억누르던 그녀는, 아버지보다 빨리 시스템에서 사라져버린 아이에 대한 아쉬움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어떡해. 우리 애기 너무 빨리 지워버렸나봐. 미안한데.. 우리 아버지도 여기선 살아 있는데, 우리 애기도 다시 보이게 해주면 안될까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그녀가 울먹였다. 두 달 전 세상을 떠난 아이의 경조비를 신청하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누구보다 더 이상 울고 싶지 않은 사람을 울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당황해서 너무 죄송하다고 제가 뭔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말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분명히 방법이 있을거라는 말로 일단 전화를 끊고 급하게 확인해보니 경조비만 지급받으면 (시스템 충돌만 피하면) 가족 데이터를 복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전화해 경조비를 지급받고 나면 다시 아이의 데이터를 되돌릴 수 있으며, 그러면 예전처럼 조회가 가능할 거라고 약속했다. 그 작은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재차 되물었다. 정말, 우리 애기도 여기 다시 나오는거냐고. 너무 다행이라고.

세상에는 끝까지 외면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그녀에게는 아이의 죽음이 그랬을 것이다. 경조비 신청은 가족을 잃은 사람의 수많은 마음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지점이자 어쩔 수 없이 외면하고 싶은 가족의 죽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 그 자체였다.

회사의 규정은 정해져 있지만, 그 규정을 해석하고 안내하는 담당자가 좀 더 유연해질 수는 있다. 업무로 만난 상대방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라 실수도 있다는 말처럼,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좀 더 그 마음을 알아주고 싶다.

그들이 끝까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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