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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Oct 08. 2018

누구의 실수도 아니라는 내 마음들

우울한 사람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것

 
우울한 사람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일은 뭘까. SNS에서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앞으로 가라는 언어유희를 본 적 있다. 맞다. 고기는 분명 기분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우울하다고 해서 매일같이 고기를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우울한 사람들에게 고기처럼 힘을 줄 만한 일이 과연 있기는 할까.
 
T는 내가 네번째로 만난 상사였다. 부장이라는 직함에 걸맞지 않게 콧소리를 잘 냈으며, 말 끝마다 나는~?이라는 마법의 두글자를 붙여 자신을 챙겨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아침 대용으로 몰래 콘푸레이크를 먹던 나를 보고 어김없이 서운해하며 내꺼는~?을 시전하던 그를 보며 뒷자리의 Y주임님은 요새 그를 볼 때마다 T의 유년시절이 너무 궁금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한 것은 냄새였다. 정확히 말하면 체취와 구취. T는 담배를 피고 나면 꼭 아메리카노를 마셔야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고 나면 담배와 커피가 빚어내는 환상의 악취 오케스트라가 펼쳐졌다. 저 자가 내 후배였다면 당장 양치하라고 불같이 화를 냈을텐데. 후배의 냄새였다면 뺨을 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자는 우리 팀의 최고참 부장이었다.


게다가 T의 꼬랑꼬랑한 체취는 그가 활동하는 응접실의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너무 프라이빗해서 아무도 묻진 못했지만 그의 평균 샤워주기는 3~4일에 1회 정도일 거라고 우리들은 입을 모았다. 본인도 찔리는지 당장 회사 비용으로 디퓨저를 사달라고 목을 졸랐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디퓨저. 다른 사무실로 배달갔으면 세 달 정도는 버텼을 텐데 여기선 한 달만에 요절을 했다. 우리 모두는 가엾은 디퓨저의 명복을 빌어줄 수 밖에 없었다.
 
T가 냄새만 풍기고 다녔다면, 그렇게 크게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구린내를 풍기는 것도 모자라 악취를 동반한 부당한 업무지시를 해서 우리를 괴롭혔다. 아. 적어도 구취는 냄새만 났다. 다만 불행한 것은 T가 자리를 떠도 그 구취만큼은 공기중에 남아 T가 약 5초전에 이 장소에 있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실로 힘세고 강하며 충성스러운 냄새 아닌가. 사육신이 아니라 사육취인가.
 
결재를 받으러 그의 응접실에 갔다가 T가 이미 퇴근해버려 돌아오다 구취만큼은 그가 막 떠난 그 공간에 남아있어 이를 코로 직접 확인하고 경악한 직원들도 몇몇 있었다. 하지만 체취의 경우는 직접적인 증거물이 있었다. 바로 빨랫감이었다. 그는 세탁을 요구했고 ‘부하직원이 해주는’ 세탁서비스를 받기 위해 직장에서 120km 떨어져 있는 자택에서 세탁물을 가져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핑계는 우리 와이프도 일을 해서 바쁘고 어차피 세탁소에 맡기려면 세탁물이 많아야 좀 면이 살지 않냐는 것이었다. 우리의 반박은 그러면 당신이 거주하는 B시의 세탁소에 맡기면 되잖아요?였지만 역시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탁 뿐 아니라 종종 현금을 건네며 간식을 사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삼각김밥을 사면 무조건 데워줘야 했고 우유엔 빨대를 꼭 꽂아줘야 했다. 그의 나이 50줄의 이야기다. 나는 삼각김밥을 데우는 30초가 무척이나 긴 시간이라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간식과 함께 거스름돈을 돌려주자 다음에도 먹을 거니까 장부를 만들라는 말만이 돌아왔다.


그렇다. 내가 네 번째로 만난 상사는 아무래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백 번 양보해서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물으면 네가 안타줘서 못먹고 있잖아~하고 나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혹시 상처받은 건 아니지? 라는 말을 덧붙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다.

그럴 때 마다 부아가 치밀었다. 나같은 말단 직원도 인간의 존엄성이 있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데,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조차 안 해주는 것 같아서. 어쩌면 T는 나의 존엄성을 갉아먹는 존재였던 것이다.
 
T와 같이 지낸 지 6개월이 지났을 때, 나는 결국 우울증을 진단받았다. 의사는 아주 경미한 정도지만 약물치료를 해야한다고 했다. 나는 적극 동의했다. 그 와중에 방법이 있다는 것이 아주 달가웠다. 날이 갈수록 회사에서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자주 무너졌고, 웃고 싶지 않은데 웃어야해서 힘에 부쳤고, 화내지 말았어야 할 상황에 돌연 화를 내서 모두를 놀라게하기도 했다.
 
나 우울증이래, 하고 주변에 말하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았다.(여기서 부모님은 예외다) 그보다 어려운 것은 돌아오는 말들이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내가 그리 고생하며 살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그냥 타고나기를 상처를 잘 받도록 설계되어 태어났다. 요즘 말로 하면 개복치 정도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마음이 여린 나는 내 맘이 다치는 게 싫어 남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사랑받을 줄 알고 사랑을 주는 일에도 익숙하다는 것을 큰 무기삼아 살아왔었다.
 
주변 사람들은 보통 나에게 이런 말들을 말했다.
"너, 생각보다 많이 약하구나?"
"그래보이긴 했는데 진짜 마음이 여리네.."
"근데 그 약, 안 먹을 수는 없는거야?"

“넌 좀 더 커야돼”
 
모두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제일 많이 들었다.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묘하게 내가 약하고 능력이 부족해서 우울해졌다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럼에도 그 때 당시엔 용기가 없어 내가 듣고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실제로 말뿐인 위로는 정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말 도움이 됐던 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바보처럼 운 기억. 형광물질이 많다는 술집의 거친 휴지로 눈물을 흡수시키며 너털웃음을 짓던 어느 겨울날, 나의 약물치료에 귀감을 얻어 같이 정신과에 다니게 된 뒷자리 Y주임님과의 동질감, 또는 모르는 사람 중에서도 회사에서 죽을만큼 힘들어 퇴사를 고민한다는 것 그 사실 자체. 즉, 날 위해 울어주는 타인이 있다거나, 나만큼 우울한 사람이 여럿 존재한다는 것이 거꾸로 내게 위로가 되었다.



얼마 전, [인생이 거지같은 사건들로 채워진 이유]라는 책을 인스타그램을 보다 우연히 알게되었다. 주인공 남연오는 은행에서 거래처 대출업무를 맡고 있는데  나의 T같이 ‘거지같은’ 상사를 만나 무척 괴로워한다. 단숨에 마음을 사로잡혀 작가님께 DM을 보냈고 바로 사서 읽어보았다. 왜냐하면 너무 궁금했다. 나만 나약해서 우울했던 게 아니라고? 하는 기대감이 생겨버렸기 때문에.

제일 마음에 든 것은 실화인 척 하는 소설이라는 점이었다. 있음직한 일들을 표현하는 게 소설아닌가. 그러면서도 적당히 발을 뺄 수도 있어 표현에서 자유로워진다. 읽는 내내 나는 왜 이 생각을 못했지? 하고 감탄하며 읽었다. 두번째로는 하나같이 우울한 얘기로 가득 차 있어서 좋았다. 학교에서 배운 소설은 대부분이 해피엔딩이다. 마무리를 위한 급조된 행복이 어딘가 너무 소설스럽단 생각을 했다. 어차피 소설은 있음직한 일들을 묘사할 뿐 현실이 아니니까. 그러나 연오의 삶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소설이 끝났다고 해서 갑자기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점이 제일 좋았다.


사실 나는 악명높은 T가 떠나고 두달만에 항우울제를 끊었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지대한 관심이 생긴다.


내가 평소답지 않다고 걱정하던 회사 언니에게 조심스레 우울증을 고백했을 때, 그 언니의 대답을 듣고 펑펑 운 적이 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나도 집안일 때문에 그런 적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괜찮아졌어. 그래도 병원도 다니고 노력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너무 걱정하지마. 그리고 정말 괜찮아질거야.”

누구의 실수도 아니라는 내 마음들. 나는 그 마음들을 꼭 쥐고 펑펑 울고나서야 알았다. 사실은 내가 나를 제일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걱정되는 마음을 드러내면 무너질까 내색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우울증으로 병원에 다니지만 그렇다고 유쾌함을 잃고 싶진 않았던 나의 알량한 자존심을 무너뜨린 건 진심으로 던진 한마디였다.

나는 결코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

부족하고 약해서 우울한 게 아니라

살다보면 슬플수도 있지 하는 가벼운 생각,

날 위해 울어주는 친구들 몇 명.


이런 것들이 우울한 사람에게는 가장 위로가 된다. 우울한 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어쩌면 우울함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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