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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Aug 04. 2019

막걸리를 마실 때 중요한 것들

다 마신 막걸리도 다시 보자


금요일마다 막걸리를 마신 지 삼 주가 됐다.

첫 번째는 다음 주 휴가를 앞둔 팀장님의 벙개 소집으로 영등포에서 한 주전자에 딱 두 병 들어가는 막걸리를 네 주전자 마셨다. 우리 팀장님은 평소 회식 날짜를 미리 잡으면 서로에게 부담이 된다면서 질색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벙개소집에는 굉장히 능하다. “다음 주 금요일에 벙개 어때?”라는 말을 일주일 내내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귀에 피가 날 지경이 되어서야 미리 잡은 회식과 급 벙개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전혀 모른 채로 국내 최초 예고 벙개에 참석하기로 했다.

사실 벙개가 성사된 것은 팀장님의 지갑 덕분이었다. 나는 팀장님이 막걸리를 쏜다는 말에 설레서 점심도 반만 먹었다. 팀장님 돈으로 먹는 두부김치와 해물파전, 동태전 그리고 막걸리는 꿀맛이었다. 막걸리는 뒷전이고 게걸스럽게 전을 마구 욱여넣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팀장님은 평소에 못 먹고 사냐고 의아해했다. 팀장님은 끝까지 벙개를 고집한 이유를 우리가 부담스러울까봐 그런 거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사실 우리 셋은 팀장님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부담스러웠다면 조금 쓰레기 같지만 있지도 않은 선약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안주먹으러 갔다는 게 학계의 정설


하지만 우리는 쓰레기가 아니고 보석 같은 팀원들. 자칭 팀장님이 두부라면 김치 같은 팀원들, 혹은 팀장님이 막걸리라면 주전자 같은 팀원들이다. 그래서 팀장님의 착각을 바로잡기 위해 한 마디 했다.

“팀장님 죄송하지만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같은데 사실은 저희 팀장님 별로 안 부담스럽거든여????”

그리고는 한동안 깔깔대며 박장대소한 후 막걸리를 원샷하고 스노우 어플로 우비를 입고 다같이 인증샷을 찍었다. 너무 맘에 들어서 집에 가는 길에 팀장님에게 우비 사진을 보냈는데 늘 그렇듯 읽씹당했다. 사실 팀장님은 웬만해선 나에게 답톡을 한 적이 없다. 고요 속의 외침. 어쩌면 팀장님은 날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님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던 우리 셋은 지하철을 타러 가다 너무 목이 탄다는 이유로 설빙에서 메론빙수까지 먹은 후 깔끔하게 헤어졌다. 팀장님이 쏜 첫 번째 막걸리는 성공적이었다. 막걸리를 먹을 때 누구의 지갑으로 먹는지가 아주 중요했던 하루였다.


이 세상에 메론설빙 안 먹은 사람 없게 해주세요...


두 번째 막걸리는 동네친구와 함께 했다. 첫 번째 막걸리가 너무 맛있었기에 오늘의 술로 단번에 막걸리를 추천했다. 때마침 양천구의 자랑 형배네 포차의 뒤를 이을 동네 막걸리집도 발견해서 우리는 몹시 설렜다. 첫 번째 막걸리집과 달리 이 곳은 퓨전 선술집이었다. 우리는 알밤 막걸리와 크림명란감자를 시켰다. 알밤 막걸리는 엄청 달았고 친구는 소주가 땡긴다고 했다. 크림명란감자는 크림파스타 소스와 으깬 감자의 조합이었는데 묘하게 달았다. 그리고 사실 내 동네친구는 그 날 낮술을 했다. 나를 만나기 전에 여럿이 소주 맥주 합쳐 열 병 이상 마셨다는 그녀는 막걸리에 내줄 여력이 그리 많지 않았다.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던 것 같은 알밤막걸리와 크림명란감자...


하지만 나는 낮술은커녕 무알콜 상태였다. 아쉬운 마음에 안주를 다시 시키기로 했다. 단 맛에는 역시 매운맛이 강적이다. 우리의 선택은 매콤 토마토 바지락찜. 그냥 토마토 파스타 맛이었다. 막걸리만 오렌지에이드로 바꾸면 완벽해질 것 같은 맛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새로운 막걸리를 시켰다. 새로 나온 호랑이 막걸리는 전용 컵도 귀엽고 맛도 있었지만 낮술 친구의 흥은 오르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안주인 먹태를 시켜 입 안을 정화해야 했다. 나는 크림명란감자를 잘못 시킨 책임을 지고 술값을 냈다. 막걸리를 먹을 때 상대의 혈중 알콜농도와 안주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달은 날이었다.


호랑이의 귀여움으로도 더이상의 음주는 불가


세 번째 막걸리는 88이들과 함께 했다. 총 네 명으로 이루어진 모임인 88모임은 90년생인 나를 제외하고 모두 88년생이라 88모임이다. 입사 시기는 다르지만 같은 시기에 비슷한 업무를 하다가 친해져 버린 사람들이다. 나 혼자 90년생이지만 넷 중에 덩치가 제일 크며 언니 대접이라고는 1도 안 하는 무개념 동생이기에 슬프지만 그 누구도 나를 88이 아니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들에겐 공통적인 감성이 있다. 바로 성과급 감성이다. 어떤 소비도 ‘성과급도 받았는데’라는 허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막걸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의도에 있다는 정갈한 막걸리 맛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미리 네이버로 예습한 결과로는 막걸리도 안주도 맛있는데 비싸다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7월 말에 성과급을 받고 성과급 병에 걸려 돈이 쓰고 싶어 안달 난 우리에게 딱인 것 같았다. 연차 촉진을 위해 작년부터 도입된 괴상한 휴가 유형인 반반차(1/4 연차)를 쓴 88이 한 명과 시차출퇴근제를 이용해 무려 17시 30분에 퇴근한 88이 한 명과 90이 한 명은 영등포에서 택시를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애석하게도 88이 한 명은 참석하지 못했다. 우리 셋은 무려 18시가 되기도 전에 여의도에 도착했다. 여의도의 수많은 빌딩 숲을 보며 진정 나의 직장 영등포와 꽤나 멀어졌음을 실감했다.

설레는 맘으로 어느 건물 5층에 위치한 막걸리집에 갔는데 아니 벌써부터 실내에 자리가 없다고 했다. 여의도 막걸리노 막걸리나들은 생각보다 부지런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차를 쓸 걸 그랬다며 (사유 : 막걸리) 한탄하며 하는 수 없이 테라스 자리에서 먹기로 했다. 그 날은 폭염 경보 재난 문자가 두 번이나 온 날이었다. 하지만 택시까지 타고 여의도에 왔는데, 막걸리 너무 많이 먹지 말라는 기사님의 당부까지 받은 마당에 쉽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푹푹 찌는 밖에서 유리 너머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막걸리를 마시는 실내를 구경하다 보니 마치 영화 기생충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띵똥 벨도 없어서 측은한 눈빛으로 다급하게 손을 흔들어 보여야 했는데 그 와중에도 아무도 봐주지 않았다. 얼른 술이라도 먹고 싶다는 88언니들의 간절한 바람에 힘입어 90이인 나는 막내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종업원을 직접 찾으러 갔다. 직원은 직접 찾아와 주문을 하겠다는 바깥 손님에게 조금 놀란 눈치였다. 너무 더운 나머지 실내에서 주문이라도 하며 시간을 때워보려 했지만 직원은 내 속도 모르고 나를 다시 바깥으로 내몰았다. 신기하게 생긴 이동식 띵똥 벨을 주면서 다음부턴 이걸 누르라했다. 우리는 여름 한정 수박 막걸리와 묵은지 탕수육과 호감전을 시켰다. 언제나 그렇듯 한정이라는 말은 여자를 설레게 한다.

나에게는 오랜 악취미가 있는데 친구를 만나면 음식이 나오기 전엔 셀카를 찍고 음식이 나오면 음식 사진을 백 장씩 찍어야 하는 버릇이다. 그날도 자연스럽게 매일 피부처럼 지니고 다니는 삼각대 셀카봉을 꺼내 세팅을 했다. 88이들과 나는 자연스럽게 동영상까지 찍으며 개덥지만 전혀 아닌 척 가상의 시청자들에게 수박 막걸리에 대해 열렬히 설명했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멘탈을 위해 테라스가 좋은 척했지만 사실은 안으로 들어가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목덜미가 땀으로 범벅되던 그때,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 먼저 테라스에서 술을 먹던 막걸리노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실내행을 거절한 것이다.


실내에서 먹어서 더 맛있는 수박막걸리^^
몹시 호감이었던 호감전... 새우깡 뺨치구요


더위에 강한 여의도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첫 막걸리가 나오기도 전에 에어컨을 만날 수 있었다.  묵은지 탕수육과 수박 막걸리도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수박 막걸리는 대존맛이었다. 호박과 감자의 조합이라는 호감전 또한 대단히 호감이었다. 하하 역시 막걸리는 전이야. 우리는 호감전을 먹으며 비호감인 어떤 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두 번째로는 끝맛이 깔끔하다는 채소 막걸리를 시켰다. 500미리를 시켰다가 생각보다 작은 크기에 보자마자 1,000미리로 바꾸는 실수를 범하는 와중 갑자기 비장하게 화재 경보가 울렸다.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즉시 대피해주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즉시 대피할 수 없었다. 1,000미리의 막걸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화재 대피 방송이 끊기지 않고 계속됐기 때문에 갑자기 이 곳에서 막걸리를 먹다가 생을 마감하면 어떻게 될지 고민하게 됐다. 이제 내 유언은 수박 막걸리 개맛있어와 채소 막걸리 깔끔해가 되는 건가. 다들 동요했지만 아무도 대피하러 나가는 사람은 없었기에 우리는 혹시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셀카를 찍는 게 어떠냐는 해괴한 잡담을 나누었다. 다행히 화재 경보는 곧 중지됐고 직원을 통해 다른 층에서 발생한 일이 조치가 완료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도저히 채소막걸리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마치 새 삶을 얻은 기분으로 우리는 안주를 새로 골랐다. 블로그에서 말해준 것처럼 가격에 비해 안주 양이 다소 적었기 때문이다. 비호감인 어떤 사람 이야기를 하다 보니 호감전은 어느새 동이 났다. 세 번째 안주는 금방 동날 일이 없는 차돌 얼큰탕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차돌이 얼큰해질 시간이 한참이 지났는데도 차돌 얼큰탕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막내로서 사명감을 발휘해 직원에게 차돌 얼큰탕의 안부를 물었다. 하염없이 흔들리는 직원의 동공을 보며 주문 누락을 확신했고 그가 떠나자마자 우리는 악마처럼 낄낄대며 서비스를 기대했다.

역시 직원의 순수한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누락된 차돌 얼큰탕은 이제야 얼큰해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대신 마른안주를 서비스로 준다는 말에 우리는 아까와는 달리 한껏 이를 악물었다. 고작 서비스 하나에 마음이 스르륵 풀리는 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우리는 마른안주가 나오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셋 다 선홍빛 잇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때아닌 마른안주 서비스 덕분에 신이 난 우리는 동료들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더 이상 희생양을 찾지 못한 우리는 각자의 팀장님들에게까지 영상통화를 걸어 마치 서로의 예비신랑이라도 되는 듯 수줍게 인사를 하며 그들의 소중한 금요일 저녁시간을 훔치기도 했다.


얼큰차돌탕과 서비스 마른안주 그리고 송도막걸리.


그렇게 탄탄한 안주에 힘입어 두 병의 막걸리를 더 먹은 후에 우리는 막걸리집 영업 종료와 동시에 그곳에서 내뱉어졌다. 사진충인 나는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사진을 찍어댔는데 왜냐하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다 먹은 영수증을 찍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식이 나온 것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는 내 모습에 두 88이들은 혀를 찼다. 여의도 환승센터는 명성에 걸맞게 우리 셋의 집으로 갈 버스가 모두 있었다. 안주를 막걸리와 1:1 비율로 먹은 탓에 하나도 취하지 않은 우리는 각자의 버스를 타러 뿔뿔이 흩어졌다.

오늘 찍은 사진은 오늘 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는 버스에 앉아 흐뭇하게 오늘의 셀카부터 막걸리와 안주 사진을 복기하고 있었다. 마지막 영수증까지. 셋이서 참 많이도 먹었다며 넘기려던 차에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한 병 먹은 막걸리가 두 병 먹은 거로 되어있었다. 무려 만이천 원이나 하는 막걸리라서 손이 몹시 떨렸다. 성과급 병엔 걸렸지만 만이천 원에 손이 떨리는 나란 소시민. 마시지 않은 막걸리를 소명할 시간은 오늘뿐이라는 생각에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지긋지긋하게 마감 시간까지 마신 탓에 벌써 가게 문을 닫은 건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송도막걸리 2병 왜죠... 눈뜨고 베어버린 만이천 원


다행히 몇 분 뒤 가게 번호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고요한 금요일 밤의 버스에서 송도 막걸리 한 병은 우리가 먹지 않았다고 소명하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지만 90 막내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설명했다. 직원은 마감시간에 맞춰 나가신 손님이라 기억하고 있다는 TMI를 방출하며 메모를 남겨주겠다 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나 같은 사진충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휴. 눈 뜨고 막걸리 베이는 세상. 나는 88언니들에게 송도 막걸리 한 병에 대한 소명을 완료했다고 보고하며 평소 사진 찍는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 지 한껏 생색을 냈다.

막걸리를 먹을 땐 누군가의 지갑, 상대방의 혈중 알콜농도, 안주 선택도 중요하지만 실내 온도, 화재 가능성, 영수증 확인도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하루였다. 다 마신 막걸리도 다시 보자. 안 먹은 막걸리가 당신의 영수증에 무임승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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