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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Aug 10. 2019

소설이 작가에게 걸려 온 전화 같은 거라면

한국 소설은 친한 친구에게 온 전화처럼 반갑다


내가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세 살 터울의 언니는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진성 책벌레였다. 화장실에서도 책을 읽고, 친척집에 놀러 가면 그 집에만 있는 책을 찾으면서 눈을 반짝이곤 했다. 반면 나는 언니가 화장실에서 나와서 같이 놀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친척집에선 나한테 눈길도 안 주는 언니가 마냥 야속하기만 한 동생이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런 책벌레를 제치고 국문과에 진학했다. 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몸소 증명하며 대학생활 4년을 ‘책 안 읽는 국문인’으로 지낸 후 졸업했다.

그런 내가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슬프게도 대형 인터넷 서점에서 주는 사은품 때문이었다. 귀여운 도라에몽 담요를 받으려면 5만 원 이상은 꼭 사야 했기에 진지하게 책을 골라보았다. 갖고 싶은 사은품이 생길 때마다 이 책 저 책 사 모은 결과, 나는 한국 사람이 주인공인 한국 소설을 제일 좋아한다는 다소 복잡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공감되는 문장을 찾아 찍어두는 허세스런 습관이 있다. 오로지 지적 허영심 하나로 모아 온 사진들. 사진만 봐도 한국 소설이 월등히 많았다.


생각해보면 외국 소설은 유독 다 읽지 못하고 덮은 적이 많다. 예를 들어 일본 소설을 읽다 보면 일본 특유의 문화에 대해 작게 설명을 달아두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렇게 책을 읽다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몰입이 깨져서 더 이상 집중할 수가 없다. 소설을 읽을 땐 자연스럽게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게 되는데 부연설명을 보지 않고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순도 100%의 미도리나 나오코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슬픈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이름도 문제다. 한국 이름은 대부분 세 글자면 끝난다. 그런데 세계 각국의 이름을 보고 있자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너무 길거나 생경한 어감에 얘가 누구였지 하다가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고 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바보스러움에 통탄하며 기억력 나쁜 애국자가 되어 한국소설을 찾게 되는 것이다. 경애라든가, 다희라든가, 희은이라는 이름은 몰입하기에 아주 적절하다. 다른 건 몰라도 한국소설을 읽을 때만큼은 순도 100%의 경애나 다희, 희은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갖게 된다.

그렇게 소설을 읽다가 평소에 품고 있던 사소한 의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기도 한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궁금증이 들게 마련이다. 그 모든 것을 친구나 선배, 지나가는 사람들 등등에게 혹시 이런 생각 해본 적 있느냐고 몇 번을 물어봐도 이제는 도저히 물어볼 사람이 없는 것 같을 때, 나는 책을 읽는다. 최근에 읽은 소설에선 이 대목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모든 것은 언젠가 시드는 거란다.
제일 큰 캔을 넣었는데도 사라지는 참치처럼, 어쩌면 모든 것의 종말은 이러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연인들의 사랑이나, 신입사원의 열정, 식어버리는 모든 것처럼, 쿠릴열도에서 하와이에 이르는 수역을 뛰놀던 참치들이, 자신들의 100분의 1도 되지 않는 캔에 담겨, 결국 찌개 속에서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송지현(2019)


어떻게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시들고 사라진다는 말을 김치찌개 속의 참치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대목에서 지난 삼십 년간 찌개에 참치를 넣으면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지 궁금했던 게 과연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강력한 유대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찰떡같은 비유로 영원할 것만 같았던 삶의 허무함 또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만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사소한 의문을 소설 속 주인공에게서 발견하는 짜릿한 독서의 순간은 나에게는 한국 소설을 읽을 때 자주 나타나는 일이다.

소설가 김금희는 소설이란 ‘받지 않는 전화를 오래 거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도, 어쨌든 수신처가 있다는 확신 속에서 통화만 이루어지면 쏟아낼 이야기를 온몸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소설가라고 말하면서.

AXT 24호(2019.5-6)


김금희의 전화를 여러 번 받아본 독자로서, 나는 그녀의 표현을 빌려 한국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 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소설이 작가에게 걸려 온 전화 같은 거라면, 내게 한국 소설은 친한 친구에게 온 전화처럼 반갑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된 외국소설도 좋지만 그건 뭐랄까, 마치 한국말을 하는 외국 승무원을 만난 기분이다.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책을 읽어온 내공이 없는 나는, 오늘도 외국 소설가의 전화는 모른 체하고 한국 소설가의 전화만 편애 중이다. 부디 언젠가는 작가와 등장인물의 국적을 따지지 않는 내공이 생기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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