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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Aug 26. 2019

그 어떤 여름날

20대와 30대의 어떤 여름날


8년 전의 기억을 꺼낸 것은 베트남에서 온 호사장 덕분이었다. 그는 베트남에서 막 귀국한 것이 무색하게도 용산 아이파크몰 에머이에서 보자고 했다. 이제 호사장에게 주식은 한식이 아니라 베트남식이 된 걸까 하는 의심을 품으며 역에 도착했다. 봉사동아리 ‘러어나’ 창단 멤버인 우리 네 명은 약 4년 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러어나’는 캄보디아 말로 ‘잘했어’라는 뜻이다. 8년 전 캄보디아 해외봉사 활동에서 만난 우리는 캄보디아에 대한 미련을 견디지 못하고 돌연 동아리를 만들었다. 선유도 공원에서 케이크를 자르며 성대한 창단식을 치렀으나 놀랍게도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활동이었다. 봉사를 핑계로 실컷 놀기만 했다. 어쩌면 ‘러어나’는 캄보디아를 추억하기 위한 모임이었는지도 모른다. 캄보디아를 떠올리는 일 외엔 딱히 한 일이 없으니 말이다.

우리가 봉사활동을 한 곳은 캄보디아의 따께오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샤워 시설도 양변기도 에어컨도 없는 곳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물을 돌려 세수를 하고 양치를 했다. 그러니까 씻으려면 나 아닌 누군가가 꼭 필요했다. 화장실에 물내림 버튼 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일을 보고 나면 조용히 물을 퍼서 뿌리는 방식으로 흔적을 없앴다. 매일 아침 화장실에 간다고 장 운동이 활발하지 못한 뭇 여성들의 시기 질투를 받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샤워는 늦게 할수록 불리했다. 받아둔 물을 바가지로 퍼서 양심껏 씻는 시스템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물이 모자라서 샤워를 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다. 나는 씻을 때마다 물의 양을 보며 우리에게 남은 양심의 크기를 가늠하곤 했다.


동 틀 무렵 우물 앞.. 매일 따가운 시선을 피해 몰래 화장실에 갔다


제일 뜨악스러웠던 것은 물이 펑펑 나오는 곳이 우물밖에 없어서 맘 놓고 속옷 빨래를 할 수 없다는 거였다. 남자방에서 무언가 비밀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지면 우물 근처로 가지 않는 등 애써 딴청을 피워야 했다. 수줍음이 많았던 나와 내 친구 설마는 남들이 다 자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속옷 빨래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내 친구 설마는 괴상한 물건을 많이 챙겨 왔는데 그중 속옷 빨래에는 랜턴 헬멧이 제격이었다. 핸드폰 같은 귀중품은 미리 제출했기 때문에 손전등 기능도 쓸 수 없었다. 결국 한 사람은 랜턴 헬멧을 쓰고 미친 듯 비누칠을 하면 한 사람은 우물을 돌리기로 했다. 혹시 이 밤에 뭐 하는 거냐고 누군가 나오기라도 하면, 하던 빨래를 던지진 못하고 눈을 질끈 감고 랜턴 불을 껐다. 빨던 속옷이 부끄러운 지, 랜턴 달린 헬멧을 쓰고 전속력으로 비누칠을 하는 내가 더 부끄러운지 영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의 청춘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비밀스럽게 빨래를 해댔지만, 모두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건 점점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식사는 모두가 남자방에 모여서 했기 때문에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그 비밀스러운 빨래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겐 저 빨래에 대해 절대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다. ‘모른 척하기’는 우리들의 마지막 존엄성을 지키는 행위 같은 거였다. 우악스럽게 우물에서 비누로 머리를 벅벅 감고, 서로의 땀냄새를 공유하고, 수동으로 용변을 떠내려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팬티 존엄성. 한국에서라면 절대 생겨나지 않았을 의리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날들이었다.

속옷 빨래만 해결하면 나머지 일과는 단순했다. ‘식사 준비-설거지-봉사활동’을 세 번 정도 하면 하루가 끝났다. 오전에는 숙소 바로 옆에 있는 초등학교 뒤쪽에 축대를 쌓고, 오후에는 초등학교 아이들과의 수업, 저녁에는 하루를 돌아보는 공동체 활동을 했다. 대개 노력봉사와 교육봉사로 구분됐다. 노력봉사를 하면서 벽돌에 시멘트를 바를 때는 꼭 인중에 난 땀을 훔치곤 했다. 몸에 있는 모든 구멍으로 끊임없이 땀이 났지만 뜨거운 햇빛 덕분인지 금세 말랐다. 그렇게 활동을 마치면 몸에선 한국에서는 전혀 맡아본 적 없는, 알 수 없는 구린내가 났다. 그럴 때면 여분의 티셔츠로 갈아입고 재빨리 우물에서 당당히 빨래를 했다. 빨래를 널고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곧 학생들과 수업할 시간이었다.


만들 땐 힘들었는데 다시 보니 작고 귀여워..


형평성을 위해 색연필, 도안, 물로켓 등 수업 준비물을 거둬들이는 계산적인 우리와는 달리 아이들은 우리에게 거리낌이 없었다. 우리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등교를 하거나 하교를 늦게 하는 아이들이 꽤 있었고 몇몇은 하교 후 다시 학교에 오기도 했다. 아이들은 번거롭게 두 번 등교한 것도 모자라 돌을 직접 갈아서 하트 모양으로 만든 후 수줍은 얼굴로 선물이라며 건네기도 했다. 비를 맞으며 흙탕물에서 축구를 하기도 했고, 전 날 수업시간에 만든 티셔츠를 매일 같이 입고 다니며 우리를 뿌듯하게 했다. 밥해먹고, 일하고, 땀 흘리고, 빨래하고, 씻고, 수업하고 잠드는 단순한 일상에 우리는 푹 빠져들었다. 과제도, 학점도, 대외활동도 먼 얘기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이 곳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순수한 밤이 있었다.

캄보디아의 작은 마을 따께오의 초등학생들이 성인이 되어갈 시간에 우리도 어느덧 밥벌이를 시작했다. 누군가는 베트남에서, 누군가는 한국에서. 직장인이 된 후 돈이 최고의 위로라는 알량한 생각으로 쇼핑을 하다 문득 8년 전 그 여름날을 떠올리면 주춤하게 된다. ‘아, 돈이 아니어도 엄청 행복했던 때가 있었지’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혼자가 아니라 넷이 하게 될 때면, 내게 소중한 기억은 함께 한 그 누구에게나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캄보디아에 꼭 한 번 다시 가자는 약속을 이제 쉽사리 지킬 수 없는 책임의 영역에 들어선 30대들의 여름도 그렇게 새삼스레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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