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튼 May 04. 2019

술집계의 배산임수를 떠나보내던 날

동네 술집의 매력


첫 시작은 백스비어였다. 백종원이라는 셀럽 이름은 술집을 고를 때 큰 도움이 된다. 양꼬치와 소맥을 거나하게 먹고, 딱 한 잔만 더 하고 가자던 우리는 어느새 세 잔째 마시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맥주의 힘은 대단해서 자연스레 진심을 털어놓게 하거나 화장실을 연신 들락거리게 만드는데 하필이면 백스비어 화장실은 이층에 있었다. 형광물질이 가득한, 하얗고 거친 술집 휴지로 눈물을 닦다가 위태롭게 가파른 계단을 오르던 친구는 며칠 후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다.


“야, 그 집 일층에도 화장실 있었어. 직원들이 우릴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그 이후 한동안 음주의 매력에 빠져 지냈지만 갈수록 술집을 고르는 기준은 심플해졌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을 것. 대학생 땐 한 시간 거리에도 척척 약속을 잡아도 멀쩡했는데 회사를 다니고 나서는 집 근처가 아니면 절대 나가지 못하는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백스비어는 버스를 타야 해서 탈락. 우리는 새로운 술집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도보 10분 거리의 우리 동네의 상권은 어떠한가. 상권의 무덤이 있다면 이 곳이 아닐까.

조촐한 지하철역 하나, 중학생 때부터 굳건히 자리를 지킨 롯데리아 하나, 나름 자랑이었던 맥도날드는 이 곳이 무덤임을 증명하듯 돌연 사라져 버렸지만 오래된 텍사스팜 술집이 투썸플레이스라는 이름난 카페로 바뀔 때, 나를 비롯한 동네 주민들은 투썸을 시작으로 카페거리가 형성되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몇 년 후에도 투썸플레이스보다 더 유명한 카페는 나타나지 않았고, 텍사스팜의 지독한 하수구 냄새와 어두컴컴한 분위기도 그대로였다는 걸...




술 먹고 걸어서 귀가하겠다는 바람은 지키려면 지킬 수 있었다. 화석처럼 그 자리를 지키던 둘둘치킨이라던가 비어킹 같은 델 가면 됐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곳은 백스비어처럼 깔끔하고, 젊은이도 많고, 터무니없이 안주가 비싸지 않은 ‘요즘 술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처럼 찾아온 술집이 있었다. 명랑핫도그를 먹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친구가 핫도그 막대로 맞은편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 어때?” 건물 2층에 [동춘야시장]이라고 쓰여있었다. 홀린 듯 그곳에 갔다. 우린 술 마실 체력을 아끼기 위해 2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리자마자 탄성이 흘러나왔다. 대박사건. 동춘야시장 바로 옆엔 코인 노래방이 있었다. 풍수지리에 배산임수가 있었던가. 조상들은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을 집으로 골랐다. 우리는 지금 노래방을 등지고 술집을 바라보고 있다. 동춘야시장은 술집계의 배산임수였다. 좋아 모든 게 완벽해. 그곳은 끝까지 우릴 실망시키지 않았다. 맥주가 삼천 원이었고 만 원을 넘기는 안주가 없었다. 미친 가격에 홀린 듯 젊은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변한 것은 약속 장소뿐만 아니라 가성비를 따지게 됐다는 점이다. 돈을 벌면 벌수록 점점 구질구질해지는 내 모습이 의아하다. 그러나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한동안 성경책처럼 사진첩에 모시고 다니던 동춘야시장 메뉴판..


한 번 빠지면 모든 걸 알아내야만 하는 나는 동춘야시장의 뒤를 쫓았다. 나에게는 괴상한 취미가 하나 있는데 바로 배달의 민족 눈팅하기다. 모험정신이라곤 1도 없어서 새로운 곳에서 시켜먹진 못하는 주제에 동네 맛집을 발굴하겠답시고 별점 4.8점 이상의 음식점은 일단 찜해놓고 본다. 동춘야시장을 배달의 민족에서 다시 본 것은 며칠 후였다. 배달삼겹 직구삼이라는 이름으로 삼겹살 배달을 하고 있었다. 저런 저런. 원 가게 투 잡을 하는 사장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다음에는 꼭 구천 원 대 안주를 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오천 원짜리 안주만 시켜서였을까. 오늘도 한 번 취해보자고 달려간 동춘야시장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텅 빈 가게는 먼지만 가득했다. 사장님 주머니보다 우리네 주머니 사정만 생각했던, 기본 안주를 무한 리필해서 맥주를 마신 나날이 후회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배달의 민족에 접속해 배달삼겹 직구삼을 찾았지만 [준비 중이에요]라는 회색 메시지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취해야만 하는 날이었고 우린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동춘야시장이 망한 날, 우리는 뒷골목에서 형배네 포차를 만났다.




형배네 포차는 이름이 요즘 술집 답지는 않았지만 놀랍게도 모든 안주가 9,900원이었다. 형배는 사장님 이름이었다. 주문하면 주문자 : 전형배라는 이름의 주문서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형배 씨는 요리를 아주 잘했고 동춘야시장에서는 구운 대롱 과자를 기본 안주로 주는 반면, 이 곳에서는 따뜻한 콘치즈와 계란후라이를 줬기 때문에 우리는 쓰레기처럼 동춘야시장을 잊고 말았다. 오히려 동춘야시장이 망하지 않았다면 이런 보석 같은 술집을 모르고 살아가지 않았겠냐며 동춘 사장님이 들으면 마음을 북북 찢을 법한 말까지 내뱉었다. 전화위복이라는 사자성어가 맘 속 깊이 소맥처럼 찰랑이고 있었다.


그깟 콘치즈와 계란에 마음을 뺏긴 우리네 이름은 청춘 청춘 청춘이야


형배네 포차의 베스트 메뉴는 얼큰한 엄마손 닭볶음탕이다. 9,900원이지만 밥도 볶아야 하기 때문에 11,900원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유의할 점은 닭볶음탕을 먹으면 배가 불러서 다른 안주는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다음으로는 추억의 주전자 꼬치어묵을 추천한다. 주전자에 담긴 8개의 꼬치어묵은 밥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는 엄마의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국물마저 훌륭하다. 이제까지 무우에만 의존했던, 물 탄 어묵탕은 모두 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한 맛이다. 3차 이상이라면 반합라면을 추천한다. 반합라면은 무려 삼천 원이다. 만약 맥주를 딱 한 잔씩만 한다면 깔끔하게 만원에 3차를 끝낼 수 있다.


술 마시러 갔던 나와 술 마시러 가는 나의 조우. 반갑다 친구야..


우리 동네 도보 10분 거리엔 스타벅스도, 커피빈도, 맥도날드도 없지만 형배네 포차가 있다. 누군가 우리 동네 맛집을 물어오면 나는 자신 있게 형배네 포차를 말한다. 내 맘 속에선 형배네 포차는 술집계의 스타벅스나 다름없이 핫하고 힙하다. 나는 어제도 형배네 포차에 갔고, 추울 것 같아 오랜만에 꺼내 입은 자켓에서 1년 된 동춘야시장 영수증을 발견했다. 역시 1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내가 참 자랑스럽다. 난 어제도 한결같이 소맥이었고, 집에 올 때 걸어올 수 있어 퍽 만족스러웠다. 아무래도 동네 술집의 매력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좋아하는 마음을 깨닫는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