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튼 Apr 29. 2019

좋아하는 마음을 깨닫는 순간

일상을 다르게 만드는 힘



누군가를 처음으로 좋아하게 되었을 때 나는, 좋아하는 마음을 당장 손에 쥐어보고 싶었다. 좋아하는 마음이란 무얼까. 궁금한 마음, 걱정하는 마음,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일까. 나는 고민 끝에 좋아하는 마음은 일상을 다르게 만드는 힘이라고 결론지었다. 예를 들면, 약속 장소가 2호선 어딘가라면 그 사람과 나의 중간 지점인 환승역에서 만나서 같이 가는 것. 생각해보면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그런 비효율적인 방식을 택한 적이 없다. 좋아하기 때문에, 중간지점에서 시간을 좀 더 쓰더라도 빨리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뿐.



최근에 회사 교육이 있었다. 교육장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 환승을 2번 해서 빨리 가는 것과 환승을 1번 하는 대신 조금 돌아가는 것. 동료 A는 두 번째 방법을 강추했다. 그 방법이 본인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제일 많다는 논리였다. 그런 어리석은 제안을 하는 쪽은 보통 내 쪽이어서 A의 제안이 싫지 않았다. 그러나 지하철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았고,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셀카를 찍을 여유 따위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르는 사람을 사이에 두고 앉아 희희낙락 카톡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함께 탄다고 해도 함께 하는 게 아닐 수도 있는 출근길의 불확실성에 배팅하는 것이 좋아하는 마음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해보면 그런 일은 또 있다. 얼마 전 근처로 이사 온 동료 B는 나와 한 정거장 사이에 산다. B와 나는 매일 아침마다 같은 시간의 지하철을 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같은 차를 탄다 해도 사람이 많아서 우린 서로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결국은 종점인 신도림에서 만나 딱 한 정거장을 영등포까지 같이 가고, 나는 지하로, B는 지상으로 가기에 또 금방 헤어진다. 가끔 내가 늦는 날에 B는 10분을 신도림에서 기다려 주기도 한다. 하루는 내가 편의점에서 산 주스를 나눠주고, 하루는 B에게 여러 즙들을 건네받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비효율을 함께 즐기는 마음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10년 전, 아빠가 처음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모랑 이모부가 헐레벌떡 서울로 올라온 적이 있었다. 오자마자 삼겹살을 사다 고기를 구워 언니와 나의 저녁을 챙겨주었다. 그 당시에는 고작 우리 자매의 끼니를 챙기러 이모가 (이모부까지 대동하고) 마산에서부터 서울에 올라온 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내가 이모가 된 지 3개월이 흐른 지금, 이모의 마음을 드디어 알 것 같다. 좋아하는 마음. 언니를 좋아하는 마음은 이것저것 따질 새 없이 당장 마산에서 서울로 상경하게 만든다. 언니가 제일 신경 쓸 언니의 아이들을 챙기게 만든다. 그렇다. 좋아하는 마음은 일상적으로는 하지 않을 일을 당연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난주 금요일은 형부가 1박 2일 행사에 간다고 했다. 육아 동지를 잃은 언니는 나에게 도와달라고 S.O.S를 쳤다. 고민하다 연차를 내고 아기를 보러 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분주하던 엄마가 보따리를 하나 내민다. 갓 구운 동태전, 부추전 같은 반찬거리와 먹기 좋게 깎아 담은 참외 한 통. 아기 있는 집은 과일 깎을 여유가 없더라며 미리 깎았다는 말도 덧붙인다. 엄마는 이걸 준비하느라 늦었다며 택시를 타고 출근해야 한다고 서두른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도착한 언니 집에는 갓 백일이 지난 조카가 곤히 자고 있다. 아이가 있는 집에 함부로 벨을 누르는 건 미친 짓. 미리 알아둔 현관 비번을 조심스레 누르고 입장했다.



늘 냉정해만 보였던 언니도 어느덧 엄마가 다 되었다. 아기를 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언니는 조카가 이틀이나 변을 못 봤다며 걱정을 하고, 출근한 엄마는 전을 먹었냐고 그새 카톡을 한다. 엄마는 언니를 생각하고, 언니는 조카를 생각한다. 알고 보니 형부의 1박 2일 행사는 취소됐다고 한다.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런 말을 하는 언니가 어이없지만 화가 나진 않는다. 회사에선 이 정도면 육아휴직을 권하고 있다고 장난스레 한 마디 한다. 뒤집기에 꽂힌 조카는 밤새 잠을 설쳤고, 언니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언니가 아침에 건네는 말은 잘 잤냐고, 아기가 자주 깨서 잠 설친 건 아니냐는 말이다.



그러나 같은 순간, 나는 언니를 생각한다. 아이가 깰 때마다 일어나 안고 달래던 모습을 떠올린다. 그래서 난 괜찮다고 말한다. 엄마는 간밤에 조카가 잘 잤냐고 물어오고, 어젠 뒤집느라 많이 깼다고 하니 “그럼 지 엄마가 힘들 것인데..” 하고 언니 걱정을 한다. 생각해보면 조카가 없던 아침, 모녀가 간밤의 안부를 물었던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좋아하는 마음은 묘하다. 의외의 순간에 드러난다. 그것도 아주 비일상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좋아하는 마음을 깨닫는 순간은 아주 황홀하다. 우리의 하루에는 적어도 한 개 이상의 좋아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 좋아하는 마음을 켜켜이 쌓아두고, 먼 훗날에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작가의 이전글 쌀국수와 정육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