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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Apr 20. 2019

쌀국수와 정육점

그녀의 진짜 이름


소개팅을 할 때면 으레 받는 질문이 있다. “혹시 못 먹는 음식 있으세요?” 그럴 때마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한다. “쌀국수만 아니면 다 괜찮아요!” 쌀국수에겐 미안하지만 내 입맛엔 쌀국수의 소고기 국물은 너무 느끼하고, 고수 향은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면발도 너무 얇다. 그래서인지 베트남 쌀국수는 굳이 돈 주고 사 먹지 않는, 기피하는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쌀국수라는 말을 듣고 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나는 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부천 어딘가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당시 할 줄 아는 게 한국말밖에 없던 나는, 성인이 된 내 모습에 심취해서 봉사활동이란 걸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덜컥 봉사동아리에 가입했고 매주 다문화가정에 방문해서 한국어를 가르치기로 했다.

베트남에서 왔다는 그녀는 내 예상과 달리 한국 이름이 있었고 나는 그녀의 첫째 아이를 맡게 되었다. 첫 수업 약속을 잡기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 속에선 유창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놀랐지만 너무나 다행이었다. 하긴, 한국말이 서툴었다면 나에게 수업을 듣는다 했을 것이다. 어버버 하는 사이 그녀는 능숙하게 자신의 집에 오는 방법을 한국말로 설명했다.

나는 그녀의 설명대로 1호선 소사역에서 53번 버스를 타고 내려 근처에 있다는 정육점 건물을 찾아갔다. 집을 설명하는 단어 중에 정육점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지만 막상 찾아가 보니 정육점은 그녀의 집을 찾기에 가장 적합한 설명이었다. 새로운 곳을 찾아갈 때면 늘 헤매는 나조차도 바로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건물 3층에는 교회도 있었다. 매주 일요일. 그 어느 때보다 찬양 열기가 뜨거워지는 오전 11시, 나는 정육점과 교회 사이의 집에서 질세라 열띤 한국어 수업을 했다.

수업은 보통 1시간을 넘지 못했다. 7살 아이에게는 한국말보다 관심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예를 들면 축구나 물로켓 같은 것들. 그럼에도 내가 정육점 건물을 나서는 것은 보통 세네 시간 후였다. 그녀가 매번 맛있는 점심을 챙겨 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형형색색의 채소와 투명한 라이스페이퍼를 가지고 월남쌈을, 어떤 날은 계란말이와 스팸, 김치찌개를, 어떤 날은 피자와 케이크를. 밥을 먹고 나면 사과, 배, 포도, 멜론 같은 과일도 잊지 않았다.

밥을 먹으면서 그녀는 아이 아빠와 다툰 이야기, 이주여성을 돕기 위해 통역자로 법원에 출석한 이야기 같은 걸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았고 나는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남자 친구와 사귀게 된 이야기, 언니가 내 가디건을 입고 부산에 가서 대판 싸운 이야기 같은 걸 이야기했다. 그녀와는 동아리 활동 기간인 2년을 훌쩍 넘겨 3년을 함께 수업하고 헤어졌다. 내가 맡았던 아이에게도 새로운 선생님이 생겼고, 처음 갔을 때만 해도 너무 어려 수업을 받을 수 없었던 동생에게도 선생님이 생겼다.

3년 동안 그녀는 내게 쌀국수를 대접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나는 쌀국수만 보면 그녀의 고향을 생각하게 되고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한국에 와서 지은 이름 말고, 진짜 그녀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것이. 매주 시간을 내서 수업을 하는 것만큼이나 매주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모르고 가끔은 그 시간을 부담스러워한 것이. 그녀와 함께 한 3년을 나를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포장해서 취업에 이용했단 사실이.

무엇보다도 첫 월급을 타면 엄청난 선물을 사줘야지 해놓고 5년 동안 단 한 번도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나 자신이. 며칠 전 오랜만에 들어가 본 페이스북에서는 그녀가 누군가의 게시물에 태그되었다고 알려주었다. 태그 된 사진 속에서 그녀는 꽃과 함께 몇 년 전 그때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네이버 지도를 켜고 5년 만에 부천 어딘가의 그 정육점을 다시 검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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