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려지는 시간 속 그래도 여행은 선명하잖아
어제가 그제인가 오늘인가 헷갈린다. 맛집의 휴무일 외에는 요일 개념이 사라지는 여행 중에는 종종 있는 일이다. 사진이나 카드 결제 내역을 보고서야 아 고작 셋째 날이지만 첫날이 지난주처럼 느껴지는구나 한다.
묵는 호텔 일층은 로비를 겸한 북카페가 있는데 드나들 때마다 조용히 자기 작업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많아 나도 모닝커피와 함께 글을 쓰는 여유를 부려 볼까 했지만, 눈을 뜨는 시간은 출근하는 날과 비슷해도 역시나 한번 더 눈을 붙였다가 뜨니 해가 말 그대로 중천이다. 혼자 베개 높게 베고 누워 폰질하는 시간은 어찌나 그리 빨리 가는지. 어제도 대선 개표 방송에서 나오는 어이없는 카피바라 일상 영상을 곁눈질로 보며 피식거리다가 늦은 새벽에 잠들고 만 대가로, 오늘 아침은 시장에 가서 신선한 해산물덮밥을 사 먹어야지 하는 야무진 꿈은 또 내일로 미루었다. 내일은 체크아웃해야 하는 날이니까 적어도 오전에 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20대 초반 유럽여행처럼 아침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는 것은 이제 여행에서 없을 일이다. 일본 같은 곳은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며 볼거리도 없거니와 이제 웬만한 관광 명소 같은 곳은 성에 차지 않기도 하고 사람이 많은 게 싫기도 하고…. 오타루나 청의 호수 같은 근교 여행지는 이번엔 패스하기로 했다. 대략 사진이나 후기로만 봤을 때 혼자서 거기까지 갈 노력에 비해 감동적일 것 같지 않았고, 일정도 짧고, 귀찮게 느껴졌다. 어제는 지도를 훑다가 신사가 있는 커다란 공원이 있어 가보기로 했다.
지도에서 공원 녹지가 표시되는 길 건너부터 울창한 녹색 나무들이 여기부터 공원입니다~고 한다. 일본 도시들 곳곳에 있는 커다란 공원들을 좋아한다. 도시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안에 들어가면 울창한 나무와 드넓은 잔디가 펼쳐져 있는.
이번에는 왜 한국에서와는 다르게 공원에만 들어와도 산속에 들어온 것처럼 숨이 트이고 자연 깊숙이 들어온 느낌이 들까 생각해 본다. 종종 서울숲이나 한강공원에 가면 좋기는 하지만 이렇게 자연과 가까워 짐과 동시에 편안함이 드는 느낌과는 다르다. 여행 중이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그럴 수 있다. 한국에 비해 더 오래된 공원이고 그래서 나무들도 더 오래 뿌리 깊게 자랐기 때문에? 맞는 것 같다. 서울 도심에 있는 공원들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맞다. 서울숲엔 사람이 너무 많고 아직 나무가 덜 자랐고. 한강가의 여느 공원들은 나무가 울창하지는 못해 뜨거운 해를 피하긴 힘들어 텐트를 갖춘 사람들이 즐비하고 찾은 사람이 많은 데 비해 정해진 구역에서만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또 돗자리 가능 구역에만 사람이 들벅들벅. 서울에서 온전한 피톤치드를 마시려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지도에 길이 잘 나오지 않기도 하는 산속으로 최소한 동네 뒷산이라도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대도시에 안에 자리한 평평하고 울창한 공원이 부러웠다. 서울에선 언덕배기 없는 거리 찾기가 쉽지 않으니까. 포르투갈 여행 중 타파스 바 옆자리에 앉게 된 프랑스 사람과 이야기하게 된 적이 있었다. 얘기하고 싶지만 먼저 말 거는 건 잘 못하는 나에게 먼저 말 걸어준 것이 고마웠는데, 서울은 어떤 곳이냐는 질문에 ‘음.. 서울은 산이 많아.‘라고 대답하고 스스로 조금 당황스러웠던 게 생각이 난다. 그도 뭔가 의아해 했던 것 같고. 서울을 떠올렸을 때 다른 도시들과 다른 점으로 먼저 생각는 것이 산이었나 보다. 별로 산에 가지도 않으면서. 한국이나 서울이 어떤 곳이냐고 물으면 앞으로는 뭐라고 대답할까. 언젠가를 위해 미리 좀 생각해 놓을까 싶다.
일본 여행의 큰 즐거움은 역시 소소한 쇼핑이다. 사실은 이것저것 쇼핑 하러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별 계획 없이 가도 살 게 천지삐까리다. 물가가 오를만큼 오른 한국보다 이제는 더 저렴하고 질좋은 공산품과, 웬만하면 한국보다 싼 글로벌 또는 일본의 브랜드들. 낮에 자연 속에서 해독된 도파민은 번화한 중심가로 걸어 들어오자마자 마주치는 친절하고 혜자로운 드러그스토어, 가챠샵, 빈티지샵, 각종 가게들로 인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하며 최종적으로 편의점에 들러 어깨 묵직하게 봉투를 들고 방에 들어오고 나면 풀로 충전되어 있다.
일본에 갔다오기만 하면 살이 찐다. 하루 삼만 보 씩 걸어 다녀도 한 끼에 맥주 한잔 씩이면 지방으로 저장하는 나는 선사시대에 적게 먹어도 살아남기 쉬운 강력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아무래도 일 년 내 일본만 연이어 세 번을 다녀오다 보니 미쳐 빠지지 못한 살이 누적된 것이 작년 여름의 옷이 불편한 원인인 것 같다.
생각만 해왔던 여행 중 글쓰기를 조금이나마 실천한 첫 여행이었다. 원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여행 일상이었는데.. 요 근래 왠지 손에 잡히질 않는다. 다음에 또 어떤 도시에서 글을 쓰고 있을까. 여름휴가로는 바닷가에서 또 지난 여행을 회상하며 글을 남겨야지.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희미해지는 게 두려웠는데, 이제 그 지나간 기억 중에서 남아있는 것을 쓰게 된다면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걸러진 진짜로 인상 깊었던 기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아니 그냥 게으른 인간의 자동적 핑계 생성일지도 모르지만.
자 이제 다녀와서 쇼핑했던 잡동사니를 내가 쓸 것, 선물할 것 등으로 분류하고 여행가방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아니 이렇게 더 잊기 전에 글을 써두는 일도 남았다. 퇴근만 하면 모든 게 귀찮은 병이 있는 나는 이런 거 다 하는데 한 달은 필요하다. 욕심부렸던 물건을 좀 더 나눠주고 다음 여행을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