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 별생각 없는 삿포로 여행 생각
삿포로에 혼자 왔다. 오랜만의 혼자 여행에 익숙한 느낌이면서도 꽤나설레었다. 집에서 나설 때부터 기다림 없이 모든 해야 할 것이 빠르게 이어진다. 동행이 있을 때와 비교해서 이런 면에서는 속 시원한 맛이 있다. 비행기 출발이 30분 지연된 것을 공항에 거의 다 와서 알았다. 마스크팩 30매 세트와 히말라야 캔디 30개 세트 등을 산 면세품을 찾고도 1시간 반이 남았다.
이번 여행에서 읽을 책으로는 무려 92년에 쓰인 (지금 알았다)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챙겼다. 십수 년간 집안 책장 곳곳을 전전하던 책을 지금에서야 집어 들었다. 책 값은 7,000원이라고 적혀있다. 지금은 17,000원쯤 하네. 생각보다 많이 오르진 않았다. 슬쩍 들춰본 책 내용에서는 과거 한국의 생생한 묘사가 보였다. 시대상을 생생히 보여주는 수필을 좋아하는 내 취향일 것 같았다. 탑승을 기다리며 읽다 보니 과연 재미있었다. 분단 전 개성을 드나들던 시골마을에서 살던 집을 글로 묘사한 것으로는 모양새를 상상하기도 어려워 포기해 버렸지만 우리네 할머니의 성장기를 그려볼 수 있었다. 지방에서 서울이나 읍내 다녀간단 이야긴 많이 봤지만 개성도 북쪽 동네에선 신도시였던 것이 새로웠다.
앞쪽 좌석을 선호해 뭔가 유모차 아이콘이 있는 걸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2번째 줄을 선택했었다. 그런데 진짜로 갓난아기가 둘이나 있었다. 다행히 내 앞쪽의 아기는 비행 내내 귀엽게 방긋방긋 웃었고 대각선 방향으로 보이는 아기는.. 어찌나.. 괴성을… 지르던지…. 안아주는 것 밖에 해줄 게 없는 듯한 지친 엄마와 뭐가 그렇게 괴로운지 오만상 다 찌푸리고 울고 있는 아기도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강력한 노이즈캔슬링 기능을 탑재한 헤드셋이 있기 때문에 상황을 보다 편안히 받아들일 수가 있다. 비행기 타기 전 아빠가 공유해 준 삿포로 남쪽 바다 지진 뉴스가 떠올랐다. 이 아기들도 가는데 뭐.. 왠지 안심이 되었다.
요즘 난기류가 심하다던데 과연 쉽지는 않았던 비행기를 무사히 내렸다. 대한항공은 미리 특별 기내식(채식 등)을 선택하면 첫 순서로 식사를 갖다 주기 때문에 추천한다. 채식도 해볼겸… 김치볶음밥이나 대체육으로 제공되는 채식메뉴는 생각보다 맛이 있다. 작년 일본여행에서 나만 식사를 받고 나서 난기류 때문에 일반 기내식은 전혀 제공되지 않았고, 내리고 나니 그에 대한 보상으로 5만 원 할인 쿠폰을 받았었다.(나까지!) 사실 이번 여행은 그 쿠폰을 쓰기 위해 결심했고 그렇지 않았다면 또 귀찮음과 우리 고양이 얼굴이 아른거려 서울에서 연휴를 보냈을 것 같다. 호텔까지 편히 리무진 버스를 타려고 했지만 뭔가 공항에서 ‘리무진’이라는 단어가 단번에 보이지 않아서, 뒤에서 한국 사람이 ’JR! 우리는 JR로 가면 돼!’ 하던 소리를 듣고 나도 그냥 전철을 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세계에서 나오니 건물 사이 지붕이 드리운 일본 상점가에 인파가 북적였다. 역에서 숙소까지는 10분 정도 걸어야 했지만 지붕아래 직진을 하기만 하면 되어 안심이었다. 익숙한 드러그 스토어들과 라멘 가게, 종종 들리는 한국어가 친숙하다. 얇은 외투 하나 걸치면 되는 습도 없이 쾌적한 날씨는 우선 만점 드리고요. 가는 길에 눈길을 끄는 가챠삽에서 트렁크 끌고 들어가 하나를 뽑았다. 쿠로미처럼 옷을 입은 배드바츠마루는 못참지… 상점가 거리에 가차샵이 아주 많았다. 며칠간 뭘 뽑게 될지 너무 설렜다.
배고파서 대충 별점 좋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실패), 밤에 딱히 할 게 없어 필수코스 돈키호테를 털러 갔다. 별생각 없이 들어가도 살 게 한 트럭인 돈키호테는 도파민 성지… 항상 남들 살 때 무겁고 귀찮아서 사지 않았던 술을 이번엔 삿포로 지역 특산물이라 하는 니카 위스키 한 병이 계산 줄 기다리는 중간에 누가 두고 간 게 있길래 집어 담았다. 찾아보니 가격대비 맛이 괜찮다고 했다. 줄 서다가 옆에서 한국인들이 말하는 걸 엿듣고 바로 돈키호테 할인쿠폰을 검색해서 할인을 받았다. 돈키호테 N번차에 처음 써보는 쿠폰이었다. 집 앞 편의점은 세이코마트라고 하서 백엔샵과 편의점이 같이 있는 형태였다. 백엔샵은 언제나 즐겁다… 생필품과 간식 맥주까지 한 짐 사서 방에 들어오니 오랜만에 다리가 아프고 뿌듯했다. 내일 갈 곳은 내일 생각해야지.. 평소처럼 게임하고 놀다가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