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나 뉴질랜드로 출발했을 때, 아이들의 계획이 있었다. 뉴질랜드에 온 목적이 애들 학교였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나는 가디언 비자를 받았다. 가디언은 말 그대로 어린 자녀를 돌보는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비자다. *가디언 비자로는 뉴질랜드에서 일을 할 수 없고, 만 14세 미만의 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외출을 해도 안된다. 자녀의 보호자로서 이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자격 준 것이다.
*특별 허가를 받으면 가디언 비자로도 주 20시간 이내로 일을 할 수 있다. 아이들이 하교하기 전 am9:30-pm2:30 사이에만 가능하다.
한국에서도 혼자 일을 했고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뉴질랜드에서의 내 계획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뉴질랜드에 가서도 한국에서처럼 똑같이 일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수려한 자연경관의 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좋은 경치를 매일 보면 일이 술술 잘될지도 모른다. 건물이 꽉 들어찬 서울보다 바다와 나무로 둘러싸인 곳에서 일을 하는 게 아무래도 더 낫지 않겠은가. 그래서 아무런 계획 없이 노트북 하나를 들고 바다를 건넜다.
아이들의 삶은 준비한 대로 착착 진행됐다. 학교에 입학을 하고, 무난히 공부를 이어갔다. 금세 친구를 사귀고 학교 수업도 무난히 따라갔다. 한국과 다른 점이 많았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희석시켰다.
반면 나는 학교에 급식이 없는지라 매일 도시락을 싸는 일이 고역이었다. 식재료도 한국과 다르니 메뉴를 고르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아이들은 샌드위치도 좋아했지만 매일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싸주는 것이 영 마음이 불편했다. 다양한 도시락 메뉴를 고민하면서 자연스레 요리가 늘었다. 엄마처럼, 레시피를 보지 않고 뚝딱뚝딱 마법같이 해내는 메뉴가 점점 늘었다.
먹는 일이 어느 정도 편해지자 숨어있던 문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에게 매일 6시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설거지를 시작으로 청소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했다. 러닝도 하고 마트에서 장도 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고 나는 슬슬 애가 타기 시작했다. 누가 재촉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했다. 작년 8월에 작업을 끝낸 책이 출간되었는데, 작업의 마침표를 찍은 후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문제는, 내가 뭘 해야 할지 몰랐다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 삶의 원동력이었고, 나도 세상과 어우러져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뉴질랜드에 와서 나는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고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 뉴질랜드에 오기 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뉴질랜드에선 창의력이 절로 솟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뉴질랜드의 풍경은 기대한 만큼 아름다웠지만, 나는 그 아름다움이 낯설었다. 아름다운 그것이 나에게 자연스레 스며들도록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좋은 것들을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답답했다.
나는 바보다.
커다란 것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기쁨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모티브로 삼았는데, 바보같이 잊고 있었다. 사방에 펼쳐진 커다란 아름다움 속에서 길을 잃었다. 천천히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큰 것 안에서 작은 조각을 찾아내는 것이 나의 일인데, 까맣게 지워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내 생각을 문자를 이용해 적기만 하면 된다. 이 간단한 일을 1년을 꼬박 보내고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감정을 우수수 쏟아내다가 글이 끝나는 날도 있고 세 줄을 쓰고 더 이상 쓰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이제 무언가에게 쫓기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 오랜 시간 동안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족을 바라본다. 나는 요즘 혼자 빙긋 웃는 일이 많아졌다.
크로키가 있는 금요일, 오전에 데본포트 도서관에 들렀다가 바로 아트 갤러리로 출발하려던 계획이었다. 계획했던 것보다 시간이 여유 있다고 느껴져 집에 잠깐 들렀는데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서둘러 출발해 시티의 한 주차장에 도착했다. 하필 평소와 다르게 주차장이 꽉 차있었다. 할 수 없이 한 층을 더 내려가 주차를 한 뒤 잰걸음으로 갤러리로 향했다. 갤러리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시작 5분 전에 도착했지만 의자도, 종이도, 종이를 받쳐주는 판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행히 종이는 제공을 받았지만 바닥에 앉거나 서서 그림을 그려야 했고 종이를 받쳐줄 만한 것은 내가 가져간 작은 공책밖에 없었다. 전에도 자리가 없어서 바닥에 앉아서 그린 적이 있는데, 오늘은 왠지 서서 그리고 싶었다.
종이를 받치는 공책이 단단하지 않았고, 그 공책온 오직 나의 왼쪽 손목 힘으로만 받쳐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정이 힘들었다. 연필을 쥔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가면 공책을 받친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점점 연필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왼손과 오른손의 상호 관계에 따라 흔들리는 종이 때문에 내 의도와 다른 선들이 그어졌다.
그런데, 오히려 그림들이 더 좋았다.
가끔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대로 삶이 진행될 때가 있다. 내가 가려고 했던 길에서 멀어질수록 불안하고 초조하다. 하지만 그 길 끝에 닿았을 때 기대하지 않은 행운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인생이지 않은가. 아무리 준비하고 대비해도 내가 그렸던 삶을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허공에 떠있는 종이에 겨우 그린, 뒤죽 박 죽일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그림이 어느 날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처럼, 지나온 시간에서 기대하지 않게 얻을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을 것이다.
작은 것을 오랫동안 천천히 쌓아보려고 한다. 0.01mm 두께의 종이가 내 키만큼 쌓이면 아마, 그 안에서 작은 행복을 찾게 되겠지. 뉴질랜드의 속도에 맞춰서 걷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주 아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