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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곰 Jun 15. 2024

14. Jun.장대비 그리고 맑음.


아침에 눈을 뜨니 여전히 비가 오고 있다. 

밤새 잠을 설쳤다.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오래된 뉴질랜드 주택에 사는 나는 이중창도 아니고 새시도 아닌, 나무 창틀에 간신히 비를 막아주고 있는 듯한 유리창이 깨질까 걱정이 되었다. 설마 비 오는 걸로 유리창이 깨질까 싶기도 하지만, 강한 바람이 유리창에 부딪힐 때마다 내 가슴도 같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렇게 맞이한 아침은 찌뿌둥하게 시작됐다. 학교에서 급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일 년 내내 도시락을 싸야 하는 처지인 나는 김밥을 아이들 점심 메뉴로 정했다. 크게 생각하기 싫고 별다른 재료가 없을 때마다 나를 구원하는 메뉴다. 아무 재료나 넣고 둘둘 말면 김밥이 된다. 소시지와 달걀, 당근으로 만든 김밥을 들려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2시간 뒤에 크로키를 가야 하는데,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뉴질랜드는 정말 날씨가 변덕스럽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오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뜬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산보다 레인코트를 많이 입고 다닌다. 그 덕에 무지개를 많이 볼 수 있는 나라이기도하다. 겨울엔 오늘처럼 장대비가 많이 오는데, 이럴 땐 집에 있는 게 최고다. 한국이나 뉴질랜드나 비 오는 날에 나가면 고생이다. 전기장판을 틀어놓은 침대에 누워 불금을 즐기는 것도 꽤 괜찮아 보인다. 11시다. 이제 출발해야 하는데 비는 여전히 굵다. 하늘은 오늘 유난히 잿빛이다. 그것도 아주 진한 회색이다. 오늘도 귀찮아졌다. 금요일이라 그런가, 다른 날보다 마음이 더 늘어진다. 하루쯤 쉬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난다면 차라리 가지 말았을 것을 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저렇게 안 가도 될만한 이유를 찾고 있는 사이,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비가 조금 잦아들었다. 

어쩔 수 없이 연필 한 자루를 챙긴다.


한국에선 운전을 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뉴질랜드에서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한국과 운전 방향이 반대인지라 한적한 도로에서 역주행도 한 번 했다. 앞차를 보고 운전 방향을 계속 상기시켰는데, 텅 빈 도로에서 나도 모르게 익숙한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저 멀리 나와 같은 도로를 사용하며 다가오고 있는 차량의 운전자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느꼈을 공포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와 마주치기 전에 우회전으로 그 도로를 빠져나온 것이 다행이었다. 우여곡절을 겪고 이내 운전은 익숙해졌지만, 오늘은 짙은 구름 아래로 굵은 비까지 쏟아지고 있다. 잔뜩 긴장한 채로 하버 브리지를 무사히 건넜지만, 고속도로에서 출구를 잘못 나와 시티를 한 바퀴 돌고 주차장에 도착했다. 우산을 챙겨 들고 밖을 나왔는데, 또 장대비가 내린다. 많은 사람들이 그 비를 맞고 뛰어다니고 있다. 보행자 신호가 켜지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내 옆에 있던 우산이 없는 사람이 보여 나도 모르게 우산의 씌워줬다. 그녀는 감사 인사를 하더니 먼저 간다고 하며 후다닥 비를 맞고 뛰어갔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우산을 건네 당황했나? 싶었지만 나는 사람과 얽히는 일을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직진으로 길을 건넜고 아트 갤러리는 대각선으로 건너야 한다. 방향을 묻지도 않고 우산부터 내민 나도 참, 어지간하다 싶었다. 가끔은 본능이 생각보다 빠를 때가 있다. 마치 운전 방향처럼 말이다.


비 때문에 집에서 일찍 출발한 덕에 시티를 한 바퀴 더 돌고도 평소보다 일찍 도착했다. 진행요원은 의자를 설치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의자 설치하는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높은 천장, 비가 와 그리 밝지 않은 공간, 그 공간을 가득 메운 습기...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비가 오는 날에 그림을 그리러 왔다. 잠깐은 귀찮은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왔다. 이것이 오늘을 의미 있게 만들어줄 시간이 될 것이다. 나는 요즘 인생의 의미를 계속 찾고 있다. 바보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인생의 색이 무슨 색인지 잘 모르겠다. 죄책감이 드는 하루하루를 자꾸 쌓고 있는데 오늘은 내가 할 일을 한 느낌이 들 것 같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짙은 습기가 함께 내 속으로 들어왔다.


여느 때와 같이 크로키가 시작됐다. 여자 모델이다. 그동안 몇 번 크로키에 참석했는데 매번 남자 모델이었다. 여자의 몸을 눈으로 훑고 선으로 옮긴다. 아름답다. 날씬해서가 아니고, 몸매가 완벽해서가 아니고, 사람의 인체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림을 그리면서 왜인지 모르게 괜히 감정이 울렁거렸다. 


크로키가 끝나고 밖에 나오니 비는 그쳤다. 집에 도착했을 땐 파란 하늘이 얼굴을 보였다. 크로키를 끝낸 한 시간 만에 날씨는 180도 바뀌었다. 한 시간 만에 나의 마음도 바뀌었다. 


오늘도 오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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