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17MAY2025

by 게으른 곰

뉴질랜드에서 지낸 지 2년 하고 5개월이 됐다. 매년 열 달을 뉴질랜드에서 살고, 두 달은 한국에서 지낸다. 그러니 뉴질랜드에서 지낸 시간이 딱 24개월이다. 나는 요즘, 이제야 안정을 느끼고 있다.


그동안 우리 집에 두 번 도둑이 들었고, 그중 한 번은 경찰까지 출동해 나는 목격자 신분으로 진술서도 썼다. 내 인생 중 처음 겪는 일이었다. 경찰이 오기 전 나는 도둑이랑 악수도 하고 통성명도 나눴다. 그는 신발도 없이 후줄근한 옷차림의, 누가 봐도 노숙자였는데, 그때 나는 무언가에 씌었었는지 그냥 패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입었던 옷처럼 후줄근한 옷 한 무더기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가 우리 집과 이웃집을 오고 가며 이웃집 현관 열쇠를 찾는 것에 별 다른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는 우체통도 열어보고 이웃집 현관문을 열어보고 그 주변을 둘러봤다. 나는 이웃이 잠시 집을 다른 사람에게 렌트했나? 생각했던 것 같다. 도둑은 초라한 옷차림에 신발도 안 신었었지만, 행동은 당당했다. 나는 편견이 없는 편이고 이 나라 문화도 잘 몰랐고 평생 도둑을 만나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가 도둑일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도둑이었으면 나와 대화를 한 뒤 도망을 갔겠지. 그리고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그때가 대낮이었다. 아마 오후 1시나 2시쯤, 해가 쨍쨍했고, 우리 집은 도로 바로 앞에 있었다. 그 도로는 데본포트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24시간 내내 차가 다닌다. 누가 대낮에 도둑질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웃 주민이 집에 있고, 바로 앞 도로는 차가 끊임없이 오고 가고 있으며 나와 대화까지 나눴는데!

용감한 그의 이름은 히쿠, 나중에 경찰은 전화로 재판 자료로 쓰일 증인 출석을 요청했지만 아직까지도 연락은 없다. 그게 뉴질랜드살이 첫 해에 일어난 일이었다.


‘왜 그랬어, 히쿠. 그날 우리 집을 포함해 이웃 네 집 사람들이 모두 모였었어. 다들 네 이야기를 했어. 네 가방에서 나온 개를 재우기 위한 약 바른 고기 얘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넌 모를 거야. 넌 정말 해맑은 미소를 가졌었지. 어려운 내 이름 발음도 정확하게 잘했는데. 지금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지 궁금하다.’


또 다른 힘든 점은 겨울을 한 해에 두 번 겪는 것인데, 반쯤, 아니 거의 다 포기했다. 내가 대자연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다. 뉴질랜드와 한국이 계절이 반대인 것도 잘못이 아니고 뉴질랜드 여름 방학이 2달이나 되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내가 추위를 싫어하는 수족냉증인 이라는 점이다.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된다. 6월부터 시작되는 추위는 7,8월을 지나 9월까지 이어진다. 오클랜드는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지는 않지만 난방 설계가 되어있지 않은 집은 냉기로 가득 찬다. 겨울엔 바깥이 더 따뜻하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흐리고 비가 거의 매일 오기 때문에 야외 활동도 힘들다. 매우 습하고 춥고 흐리고 비 오는 뉴질랜드의 겨울. 정말 싫… 아니다.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놨다. 3년째 맞는 올해 겨울은, 어떻게든 신나게 보내야지.


그 외에 물가가 높고, 내가 영어를 못하고, 친구가 없어 외롭고, 살이 찌는 문제들도 있다. 이런 것들은 내 문제인데(물가 문제 빼고) 금방 해결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내하고 있다. 영어를 못하니 삶의 반경이 좁고, 생존에 필요한 활동만 하며 살고 있다. 마트에 가고, 커피와 빵을 사 먹거나 전구나 세탁기 호스, 의자, 스패너 등을 구입하는 일이다. 주로 고객의 역할을 한다. 취미 활동을 즐기거나 자원봉사 활동을 하거나 (누구는 영어가 늘기 위한 방법으로 자원봉사를 권하는데, 아직도 자신이 없다.) 사회와 연결된 어떤 모임이나 활동은 하지 않는다.

나는 참,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뉴질랜드에 와서 나는 또 한 번 스스로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뉴질랜드에서 살 사람이 영어 준비를 주민 센터 주 1회 50분 영어 수업으로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과연 제정신이었나 싶다. 그마저도 겨우 두 달을 다녔다. 그러니 총 8회 수업을 듣고 뉴질랜드에 온 것이다. 그 수업은 책 읽고, 글을 쓰고, 영화를 보고, 듣기를 하는 수업이었고 능력 있는 선생님이 정말 잘 가르치셨지만, 제일 중요한 스피킹은 없었다.


‘외국에서 살 계획이 있다면 스피킹과 리스닝을 준비하세요! 아마 다 알고 계시겠지만요.’


원어민의 영어는 그동안 내가 생각한 영어와 바다 바닥과 우주 끝 거리만큼 차이가 났다. 처음엔 많이 힘들었는데, 2년을 살면서 귀가 어느 정도 열렸고 올해부터는 영어 회화 수업을 다니고 있다. 2주 전부터 ART YOGA 교실도 간다. 이건 무려 일반인들의 취미 활동 그룹인데, 내가 이곳에 참여하다니, 내 용기가 너무 대견해서 눈물이 날 정도다. 명상을 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며 그것을 그림이나 예술 활동으로 표현하는 시간이다. 그 수업에서 만나는 키위들은 내 영어가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나는 나 자신의 평가가 바른 사람이다. 내 영어는 많이 향상됐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을 반도 못 한다. 그래도, 2년 만에 다른 사람과 소통이 시작됐다.


지금, 많은 것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제 자리를 다시 찾아가고 있다. 변한 삶의 모습에 맞춰 나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작고 미약하지만 시작했다는 사실에 큰 의미가 있다. 결과가 없어서 힘들었던 게 아니고 시작을 못해서 괴로웠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래서 아마 겨울이 오고 있는 지금이 우울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겨울이 기대될 정도다. 올 겨울은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길 것 같다.


이렇게 조금씩 삶의 쳇바퀴가 다시 돌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오리무중인 건, 내 직업이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지금껏 나는 석탄을 잔뜩 집어넣고 달리는 기차 같은 삶을 살았다. 계속 앞을 향해 달려갔고, 목적지가 어딘지도 정확히 모른 채 철길을 따라 그냥 앞으로 나아갔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열심히 내 목소리를 냈다. 그게 앞인지, 옆인지, 뒤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계속 앞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둘씩 성과도 냈다.

그러다 갑자기 딱! 멈춰 버린 것이다.


일도 친구도 모두 사라졌다. 나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딱히 바빴을 이유도 없었는데 매일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고, 몸은 늘 피곤했다. 그래서 뉴질랜드 첫 해는 참 좋았다. 이 세상에 혼자인듯한 기분이 좋았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고 나는 매일 바다를 혼자 걸었다. 빡빡한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을 겸한 한적한 도시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슬며시 외로움이 다가왔다. 애들은 이제 다 커서 주말에도 친구와 만나 시간을 보낸다. 나는 종종 주말에도 혼자다. 남편도 없고, 애들도 없고, 얼마나 좋아! 그런데 나는 바보같이 이 많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작업도 못했다. 재료도 없고 책상도 작고 종이를 파는 상점도 못 찾겠고, 화방에 있는 종이는 내가 쓰는 종이가 아니고, 같은 재료가 한국보다 1.5배 비싸고, 그렇다고 모두 다 새로 살 수도 없고… 이런 핑계 같은 어려움들이 많았다. 그래서 2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많이 걸었고 달렸다. 압박감으로부터 멀리멀리 걷고 달렸다. 그렇게 너무 멀리 간 어느 날, 우울함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요즘 나는 나에 대해 생각한다. 살면서 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ART YOGA에 두 번밖에 가지 않았지만, 두 번 모두 눈물이 고였다. 나를 바라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이 났다. 요즘 나는 내가 남은 인생동안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모두 움켜쥐고 있어서 꼼짝도 못 한다. 어느 것을 이곳에 내려놓을지 깊이 생각해보려고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아닌 지금이 불안하지만 조바심 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한 걸음을 내딛는 그날, 나는 또 다른 나를 찾을 것이다.


‘뉴질랜드에서 보낸 시간들이 그것을 찾는 것으로 다 쓰인다면, 그것만큼 성과 있는 일도 없겠지. 그리고 정말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뉴질랜드를 떠나는 그날, 아마 나는 아기처럼 펑펑 울겠지. 그리고 오래오래 아름다운 뉴질랜드를 그리워하며 살겠지.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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