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16May2025 Fri

by 게으른 곰

감기 2일 차, 아니 어쩌면 3일 차다. 이번 주 월요일 큰 애가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학교를 조퇴하고 집에 왔다. 감기약을 먹고 종일 잠을 자던 아이를 돌보기 위해 함께 누워 잔 게 원인이었을 것이다. 감기가 옮을 줄은 몰랐다. 감기는 쉽게 옮는데, 왜 그 생각을 안 했을까. 아마도 끙끙 앓는 아이가 안쓰러워서 그랬을 거다.


큰애는 다행히 화요일부터 학교를 갈 수 있었다. 월요일 밤사이 살짝 미열이 있긴 했지만,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감기는 떠났다. 기침을 남긴 채. 화요일부터 큰애는 기침을 시작했다. 학교를 가도 괜찮겠냐는 내 말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을 하며 끝에 기침을 한번 또 했다. 걱정됐지만, 이제 아이들은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엄마보다 본인이 더 스스로에 대해 잘 아는 나이가 됐다.

화요일은 나의 일주일 중 가장 바쁜 날이다. 10시에 ART YOGA 모임이 있고, 바로 영어 회화 수업을 가야 한다. 점심은 넛바로 때우는 날이기도 하다. 집에 돌아와 늦은 점심을 차려 먹기 때문에 살은 안 빠진다. 기왕이면 바쁘게 움직이는 날이니 살이 조금 줄면 좋을 텐데. 뉴질랜드에 살면서 늘어난 살은 이제 아예 자리를 잡았다.


수요일 아침에도 난 괜찮았다. 큰애는 정말 말끔히 나아 보였지만 여전히 기침을 가끔씩 했다. 그래서 이번 주는 우리 가족 모두 차를 많이 마셨다. 수요일도 영어 회화 수업이 있기 때문에 오전에 집을 나섰다. 오늘은 나탈리 선생님이 병원 예약이 있는 날이라 대체 교사가 온다고 했다. 스티브. 첫 남자 선생님이다. 작은 변화가 삶을 즐겁게 한다. 스티브는 한국에서 2년 동안 살았다고 했다. ‘안녕하세요.’라고 한국 인사로 날 반겼다. 젊은이답게 자기소개를 하자며 소개할 항목을 보드에 적는데, ‘당신의 MBTI는 무엇인가요?’가 있었다. 젊은 사람이어서도 맞고, 한국에서 살았기 때문도 맞다. 뉴질랜드는 MBTI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아시아 사람들만 안다. 스티브는 수업에 참여하는 대부분이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MBTI를 알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의 연령이 꽤 높았기 때문에 절반은 MBTI를 몰랐다. 내 MBTI는 INFP인데, I와 E의 중간쯤이라고 대답했다. Ambivert(내향적인 성격과 외향적인 성격의 중간)라는 단어를 새로 배웠다. 내 MBTI는 ANFP다. 이 날 나는 I가 30%, E가 70%였다.


문제는 저녁부터 시작됐다. 으슬으슬 몸이 추웠다. 목이 아팠다. 감기에 걸렸다. 증상은 큰애와 똑같았다. 이제 목표는 둘째에게 감기를 옮기지 않는 것이다. 매일 하는 데일리 드로잉도 못하고 침대에 누웠다. 약을 먹고 15시간을 잤다.


목요일 아침, 애들 점심은 학교 매점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갔고 나는 종일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쉬었다. 감기는 쉬어야 낫는다. 다행히 감기 증상은 별로 없었다. 가볍게 지나가나 보다. 다행히 목요일, 금요일은 특별한 스케줄이 없다. 사실, 스케줄이 있는 건 화요일, 수요일뿐이다. 먹고 자고, 영화 보다가 또 잤다. 저녁을 만들고 먹고 그림을 그리다가 일찍 누웠다. 누우면 잠이 온다. 약기운 때문인지, 감기에 걸려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잠이 많은 사람인지, 오후 8시 30분부터 아침 6시까지 잤다. 허리가 아프다.

뉴질랜드는 웬만한 감기엔 항생제를 처방하지 않는다. 작년에 둘째가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해 병원에 가서 처방받은 건 알레르기에 좋은 코 스프레이였다. 감기가 걸리면 약 먹고 코 스프레이를 뿌리고 자야 한다.


오늘 아침, 몸이 개운하다. 확실히 몸이 가벼워졌다. 열도 안 나고, 기침도 하지 않는다. 약기운 때문인지, 감기가 나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는 분에게 연락이 와 가볍게 산책을 하고 왔다. 내가 감기에 걸렸다고 했는데, 괜찮다고 했다. 오늘 해가 반짝 떴기 때문에 나가고 싶었다. 뉴질랜드는 겨울이 오는 중인데 이쯤부터 해가 귀하다. 해가 뜬 날은 밖에 나가야 한다. 빵과 커피를 사고 해변을 걸으며 어른들의 수다를 나눴다. 별다른 내용은 아니고, 그냥 사는 이야기다. 자식 흉도 보고, 직장 이야기, 고민, 이번 주에 있었던 일들을 나눈다. 햇빛을 많이 받으려고 모자를 안 쓰고 나갔는데, 햇빛이 선글라스를 뚫고 들어와 눈이 부셨다. 한 시간쯤 걷고 집에 돌아오니 몸은 더 가벼웠다. 기분이 좋아서 그림을 3장이나 그렸다. 어느덧 저녁 8시다.

아이들은 아직도 집에 오지 않았다. 금요일은 하교 후 양궁 클럽과 배드민턴 클럽이 있는 날이다. 그래서 금요일은 하루가 온전히 내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날이다. 원래 금요일은 와인 데이인데, 감기가 걸려서 와인을 마시지 못했다. 일주일 중 가장 기다리는 날인데, 어쩔 수 없다. 망할 감기.


오늘의 마지막 일과로 글을 썼다. 나는 요즘 마음이 편하다. 딱히 즐거운 일도 없고 딱히 불행한 일도 없다. 어느 날은 조금 기쁘고, 어느 날은 조금 슬프다. 조금 심심하긴 하지만, 우울하진 않다. 다행이다. 사람들과 소통을 조금씩 시작하고 있다. 어쩌면 새 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


불현듯, 아침에 둘째가 목이 아프다고 말한 게 생각났다. 부디, 주말이 평온하길. 둘째는, 요란하게 아픈 스타일이다. 제발. 부디. 산신령님, 부처님, 하나님, 둘째가 감기가 아니게 해 주세요.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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